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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7-19 20:11
谷川道雄, 魏晉隋唐에 대한 總說
 글쓴이 : 이윤화
조회 : 5,726  
魏晉隋唐에 대한 總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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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川道雄
 
一, 첫머리에
 
전후 오십 년―――세계는 지금 그것을 계기로 삼아 과거를 돌이켜 보려고 하고 있다. 그 반세기의 알맹이를 대략 파악해 본다면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 그에 잇따라 냉전체제를 기본 축으로 전개되는 세계정치의 제단계(諸段階), 그리고 90년대 초두, 극적으로 일어난 동구사회주의국가들의 와해와 냉전구조의 종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보고 있으면 전후 오십 년은 분명히 하나의 획기적인 세기를 이루고 종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완결이 있은 다음에 어떠한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를 몇 사람에게 물었을 때 아무도 그것을 확언할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는 시장원리가 전 세계를 뒤덮게 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것은 과연 내일의 세계에도 통용하는 원리가 될 것인가. 시장원리는 이미 각지에 심각한 사회모순과 격렬한 민족적, 종교적 분쟁을 야기하고 세계의 평화적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 미래는 실로 불투명하고 혹은 종래의 관념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사태가 도래할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지금 그러한 불안을 안고 있고, 지나간 반세기 안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전후의 우리나라의 중국사연구도 또한 그 실마리를 얻기 위한 오십 년 간의 작업이었다. 그것을 총괄해 나가고 장래를 향해 연구의 나아갈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 현시점에서 살아가는 연구자들의 책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총괄과 전망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듯이 이 학문적 책무를 다하는 것도 극히 곤란한 일이다. 이 책은 굳이 그 난관에 매달리자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지만, 특히 이 「총설」을 담당하게 돼 과제의 무거움 앞에 쩔쩔매고 있는 것이 필자의 지금 심정이다.
그러나 비록 어떠한 엉성한 방법이라도 좋다고 생각해 어찌됐든 틀을 정하고자 한다. 그 일에는 내가 일찍이 주관적으로 기술한 생각도 어쩌면 도움이 될 지도 몰라 그것을 아주 조금 인용하고자 한다. 「六朝社會의 기본성격에 관한 논쟁은 70년대 후반 무렵까지로, 대부분에서 종식을 고한다. 물론 그 후도 뛰어난 연구가 끊이지 않았지만 80년대 이후의 특징은 연구자 사이에서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는 일이 적어진 것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각자 흥미는 천차만별인데다가 연구영역의 세분화가 심해졌다」(「日本における魏晋南北朝史硏究の回顧」,󰡔中國史學󰡕第二卷, 一九九二年).
이러한 연구경향의 변화가 생긴 원인에 관해서 나는 새로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봤다. 「이러한 정황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간단히 설명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계내부의 문제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학계의 바깥쪽에서 퍼진 사회변모의 소산인 듯이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느낀바 대로 약간 지적한다면, 일본의 고도성장이 나은 사회적 부산물의 하나는 탈이데올로기 정황이었다. 마땅히 열기를 띠어야 할 정신은 완전히 식어버리고 즉물적(卽物的)인 인정이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역사에 관해 말한다면, 시간의 연쇄보다도 사상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강하게 기울였다. 그 하나 하나의 사상에 대해서도 그 이론이나 의미가 아닌 형상이나 기능을 문제시했다」(같은 책).
여기서 나는 魏晋南北朝․隋唐史硏究――기본적으로는 중국사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의 전후 오십 년을 70년대를 경계로 전후로 이분해, 그 전반기와 후반기에 따라 연구자의 연구경향이 크게 변화한 것을 기술한 것이다. 이 생각은 현재에도 거의 변한 것이 없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전반기는 논쟁의 시대이고, 후반기는 반대로 논쟁 없는 개별연구의 시대이다. 이 격변은 앞에서 말한 대로 현실사회의 변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연구자에게 있어서의 연구의식은 현실사회의 변화에서 상대적으로 자립을 얻었을 터이고 또한 자립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이만큼의 단절이 생긴 것일까. 혹시 단절로 보이는 것은 표면 만이고 그 밑바닥의 흐름은 전반기의 문제관심은 물론이고 나아가 후반기에도 이어져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은 신중히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되지만 적어도 전반기의 연구성과가 가령 비판적이어서 의식적으로 계승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 분명히 생각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전반기에서의 연구의 성과와 과제가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채 새로운 화젯거리로 바뀌어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이 글은 논쟁 중에 포함된 제문제(諸問題), 특히 위진남북조(다음부터는 육조(六朝)라 하겠다)수당사 연구의 시점에 관한 문제를 다뤄가고 그것을 지금 어떻게 발전시킬까를 생각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二, 六朝․隋唐史에 대한 두 가지 견해
 
島田虔次씨의 말을 차용한다면 「전후 우리나라의 중국사연구의 역사는 논쟁의 역사라고 해도 된다」(『アジア歷史硏究入門Ⅰ』序論, 同朋舍出版, 一九八三年). 그 논쟁의 중심테마를 들라면, 그것은 역시 중국사의 시대구분 문제였다. 설령 직접 시대구분을 논하는 게 아니라도 개개의 국면에서의 의논은 대부분은 그쪽으로 이어져 갔었다. 다른 입장, 다른 연구방법을 가진 연구자 사이에서 그 같은 논쟁이 전개된 것은 어떠한 동기에 의해서였을까. 앞의 졸문(拙文)을 이용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연구자 사이에서 문제관심을 공유’해왔던 까닭말고는 다른 게 없다. 그리고 그 문제관심의 공통성을 낳게 한 것은 뭐라 해도 패전이라는 현실이었다.
메이지(明治)이래 성장 발전해온 군국주의가 하루아침에 괴멸한 일은 역사학계에 있어서도 스스로의 책임을 추궁 당하는 심각한 사태였었다. 중국사연구 분야에도 중국사학의 재건이 과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 중국사를 상고(上古)부터 현대까지, 일관된 진보의 모티-브로 체계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게 됐던 것이다. 시대구분은 이러한 체계화를 위한 유력한 수단이어서 전후의 학계가 이 문제에 열중한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사의 시대구분에 관한 것은 전전(戰前)부터 內藤湖南의 주장에 동조하는 그 문하생(門弟)들에 의해 이끌려져 왔다. 이른바 교토(京都)학파의 시대구분법이 그때까지 가장 유력했었다. 그러나 전후 중국사의 재건을 강하게 지향한 「역사학연구회」 계열의 연구자 안에서 교토학파와는 다른 시대구분법이 구축돼 갔다. 1948년에 前田直典의 논문 「東アジアに於ける古代の終末」은 그러한 최초의 시도였다. 이후 西嶋定生, 堀敏一, 仁井田陞 등의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시대구분법이 들어 지면서 수정이 실시된 적은 있었지만 기본적인 틀은 변함 없이 교토학파의 구상과 대립한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 대립은 이제 현실적인 것은 아니게 되었다. 나는 이전에 이것을 어디까지라도 평행선을 그리는 두 개의 철로에 비유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이미 말하자면 녹슬어 엉겨붙은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열렬하게 논의된 이 주제가 이렇게 빨리 아무 의미도 없게 된 것일까.
양설(兩說)의 대립 점에 관해서는 새삼스럽게 설명할 것도 없지만, 최대의 쟁점은 이른바 당송변혁(唐宋變革)이 교토학파가 말하는 대로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歷硏派(역사학연구회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대에서 중세로의 진전인 것인가 라는 점에 있다. 여기서 고대․중세․근세라는 것은 단순한 명사문제가 아니다. 이들 시대호칭에는 각각의 내용이 합의돼있어 그에 관해서는 양설 모두 대체로 공통적인 이해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논쟁은 성립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 공통적인 이해는 나중에 기술하겠지만 유럽의 역사발전의 제단계(諸段階)와의 비교가 전제로 되어 있다. 유럽사는 또한 근대세계의 창출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비교의 의식은 중국사와 근대세계와의 관계문제에도 연결돼 있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양설의 기본적 상위(相違)가 위에서 말한 대로라고 한다면 육조․수당대가 바로 논쟁의 커다란 초점이 된다. 왜냐면 교토학파설(이하 A설이라 부르겠다)은 이것을 중세라 부르고 역사학연구회파설(이하 B설이라 부르겠다)은 이것을 진한(秦漢)의 연장선상에 있는 고대라고 봐, 두 학설 사이에 커다란 어긋남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 실은 前田의 논문이 이 시대를 문제로 함에 따라 시대구분 논쟁의 발단을 이루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왜 양설에 이 같은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일까.
우선 A설부터 기술하자면 A설의 창시자인 內藤湖南은 중국사를 안과 밖(內外), 두 가지 면에서 체계를 만들었다. 하나는 황제정치 모습의 추이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과 주변민족과의 관계의 소장(消長-쇠함과 성함)이다. 전자에 대해서 말하면 청조까지의 중국정치는 귀족정치와 군주독재정치라고 이분하고 있다. 양자의 경계선은 唐宋 사이에 있어서, 상고이래 당대까지가 주로 귀족정치의 시대이다. 귀족정치란 간단하게 말하면 군주도 역시 귀족계급의 일원이라고 하는 귀족계급의 연합정치이다. 상고의 그것은 주대(周代)봉건제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진다. 진한시대에는 어느 정도 군주독재정치의 경향을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귀족정치이다. 육조는 그것이 일층(一層) 발전한 모습이고 수당은 군주가 귀족계급의 힘을 억누르긴 하나 충분히 억눌러내지 못한 시대로서 이해된다. 즉 귀족정치의 시대도 진한을 경계로 해 전후(前後) 두 시기로 나눠진다. 內藤의 표현을 빌리자면 후기, 다시 말해 육조․수당시대는 「귀족정치가 가장 번성한 시대(貴族政治の最も盛んなる時代)」이다.
이 표현은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內藤은 이 시기의 귀족정치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 간명(簡明)한 규정을 내리고 있다. 육조귀족은 씨족귀족도 아니며 무인적(武人的) 영주계급도 아니다. 대대로 관료를 낸 가문이 지방의 명망가로서 성립한 것을 기반으로 한다라는 것이 그 규정이다. 이 규정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육조귀족이 아닌 관료제 시대, 다시 말해 황제정치의 시대를 거쳐 성립한 중세귀족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중세귀족이라고 해도 유럽이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영주계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파고들어서 말한다면 육조시대는 중국에 있어서 중세의 시대이고 게다가 그것은 유럽이나 일본과는 다른 유형의 중세이었다는 것이다.
內藤湖南의 시대구분론에서 또 하나의 시점은 중국과 주변민족과의 관계이다. 고대에서 중국문화는 주변을 향해 파급해 갔다. 그러나 그것이 주변민족의 자각을 재촉해 그 힘은 중국내부를 향해 작용하게끔 된다. 이처럼 안에서 밖으로 향했던 것이 반작용으로 바뀌었을 때 그것이 중세사회를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방향전환에 즈음하여선 운동이 일시정지한 시기가 있어서 과도기를 구성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후한중기에서 서진(西晉)시대까지의 2세기쯤이다. 그 후 五胡十六國․北朝 그리고 호족(胡族)색채가 짙은 수당에 미치게 된다.
內藤의 시대구분론을 더듬어 가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두 가지 측면에서의 접근이 있지만 그 양측면이 서로 어떻게 관련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중국문화가 안에서 밖으로 파급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이 역으로 안으로 작용한다는 논리를 귀족정치의 발전에 응용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 중앙의 문화(특히 儒學文化)가 지방에 파급돼 관료계급을 낳고 그것이 나중에는 지방명문가의 형성을 촉진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양자를 통일해서 말한다면 중세사회란 고대사회의 발전이 극에 이르러 질(質)을 바꿔서 성립한 시대라고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오늘도 여전히 육조․수당시대사의 기본과제로 되어있는 귀족제 및 호한(胡漢)관계의 두 큰 주제는 이미 內藤에 의해 제시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內藤의 이 대주제에 관여하면서 그 학설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중세론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岡崎文夫의 󰡔魏晋南北朝通史󰡕(弘文堂, 1932년)은 해당시대의 정치사를 자립한 귀족세력이 그 시기의 정권을 귀족제국가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으로서 그려냈다. 內藤이 말한 귀족정치를 정치사를 통해 실증한 것이다. 宮崎市定의 저명한 논문 「晋武帝の戶調式に就て」은 귀족제에 토지소유문제를 도입한 연구였다. 그 점전제(占田制)와 과전제(課田制)의 병존은 바로 토지소유에서 귀족과 황제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전후 宮崎는 A설의 이른바 「中世」와 「近世」의 토지소유를 비교한 몇 가지 논고를 발표하나 그것이 B설에 대한 반론으로서 제출한 것이라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宮崎는 이들 논고에서 六朝貴族의 토지소유가 농노제적인 경작노동력(部曲)에 의해졌다는 것을 주장했다.
宮崎의 육조〓중세설에서 큰 달성은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의 연구이다. 宮崎는 이 시대특유의 선거제도와 관료제도에 귀족제가 관철하고 있다는 걸 입증했다. 후술한 것처럼 귀족제와 관료제의 관계문제는 전후의 논쟁의 중심적 과제가 되나 宮崎의 이 연구는 이 논쟁에도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주었다.
宮崎의 주장의 또 하나의 논점은 집락사상(集落史上)의 변화에 있다. 일찍이 고대도시국가설을 외쳐온 宮崎는 도시와 농촌의 미분화형식인 도시국가체제가 한말에 이르러서 최종적으로 붕괴해 정치․군사도시와 장원적(莊園的) 농촌으로 분화했다고 논했다. 장원적 농촌은 말할 나위도 없이 지방호족의 생활거점이며 그것은 귀족계급의 경제기반이기도 하다. 이처럼 宮崎의 육조연구는 결국 귀족계급의 자립성에 관계된 것이어서 內藤의 제언을 사회경제 및 제도면에서 구체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육조〓중세론을 의식적으로 전개한 논자의 한사람으로 宮川尙志가 있다. 宮川은 정치․사회․문화 특히 종교 등을 다각적인 방향에서 보고 그 주장을 전개했다. 宮崎의 中世集落論에 유력한 근거가 됐던 「村」의 출현도 宮川의 연구를 디딤돌로 한 것이다. 그밖에 군제(軍制), 선양(禪讓) 등의 연구 모두 육조〓중세론에 이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宮川은 또한 이 시대를 유럽의 크리스트교세계에 견줄만한 종교의 시대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밖에 村上嘉實은 한대(漢代)의 예교주의(禮敎主義)를 초월한 범위 밖의 사상에 육조의 중세적 성격을 인정했다. 이처럼 2차세계대전 전후에 걸쳐 다채롭게 전개된 이들 교토학파의 육조사연구는 어느 것이나 중세론에 연결돼 있다. 그 경향을 정신사적인 용어로 응축해서 파악한 것이 宇都宮淸吉의 「東洋思想史の領域」에서 나온 ‘자율성(自律性)’이란 용어였다.
宇都宮은, 시대에는 시대의 인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것을 시대격(時代格)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진한시대의 그것을 ‘정치성(政治性)’이라 규정하고 이것에 대해서 육조의 시대명을 ‘자율성’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의 발전된 시대이면서도 몇 부분은 진한시대에 회귀하는 경향을 가진 수당시대를 양자의 종합이라고 생각했다. 宇都宮에 의하면 중국중세의 시원(始原)은 진한에 있고 그 종극(終極)은 수당이다. 그 가장 중세적인 성격은 육조의 ‘자율성’에 있고 그 ‘자율성’을 체현(體現)한 것이 귀족계급이다. ‘자율성’이란 존립과 운동의 계기가 그들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육조귀족은 황제권력을 중심으로 하고 움직이는 ‘정치성’과 다르며 그 자립적인 권위에 입각하는 것이다.
교토학파의 접근방법의 각도는 여러 가지이지만, 육조사회가 귀족계급을 중심으로 황제권에 의한 관리체제와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를 만들어내고 오히려 그것이 사회의 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 이차원(異次元)의 세계의 근본적인 기초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뒤에서 다룰 생각이지만 줄여서 말한다면 진한시대와는 질이 다른 시대로서 이것을 중세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에 대해 B설은 한 마디로 말하면 육조를 진한과의 연속성에서 이해하는 입장이다. 전후에서 가장 빨리 그 견해를 보인 것은 앞에서 기술한 前田直典의 논문일 것이다. 前田의 A설에 대한 비판의 논점은 대략 두 가지이다. 그것은 육조시대의 대지주경영에서 주요한 경작노동력이 A설에서 말한 부곡(농노)이 아니고 前田의 스승인 加藤繁이 설명한 노비(노예)라는 것, 또 균전(均田)농민이 국가적 농노가 아니라 그 요역(徭役)부담의 과중함이 나타내고 있듯이 반노예적 존재였다는 것이라는 두 가지 점이다. 다시 말해 사적토지소유 및 국가적 토지소유 쌍방이 어느 쪽이나 다 노예제적 노동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고 하여 그런 까닭으로 이 시대를 고대의 범주에 넣은 것이다.
이 중에 사적경영에 있어서의 노예제에 관해 보다 실체적으로 논한 사람이 1950년 전후의 西嶋定生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西嶋는 춘추전국의 씨족제 해체에 의해 발생 대두한 호족층의 계급적 기초를 가부장적 가내노예제(家內奴隸制)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 경우 노예제는 가내노예제라는 규정된 노예제이어서 호족층은 주변의 공동체농민을 小作民으로 파악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가부장적 가내노예제를 보완했다고 생각했다. 이 노비와 소작민과의 복합형태를 西嶋는 중국형 노예제라고 규정했다.
이 중국형 노예제라는 구상에도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의 생산양식에 의한 발전단계의 법칙이 중국사를 관철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며, 그 두 번째는 허나 그것이 중국고유의 모습의 경우에만 발현하고 있다고 하여 앞의 주장을 배려한 것이다.
물론 전자가 主이고 후자가 從이어서 가내노예제가 기본 축이 되어 가전제를 낳았다는 것이지만 그 뒤 西嶋은 이 설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설을 제기했다.(후에 기술하겠다) 이것은 후자, 다시 말해 중국사회의 고유성이라는 측에 크게 기울어진 결과였다.
그럼 西嶋가 진한시대에 대해 파악했던 가부장적 가내노예제는 진한이후의 시대에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 西嶋 자신은 육조․수당으로 시대가 진전해 감에 따라 고대노예제로서의 균전체제로 가는 결과가 된다고 예측하고 있었으나 사실(史實)을 가지고 논증하고 있진 않다. 그러나 堀敏一이 당송변혁의 의의를 물어 수정하는 모양으로 이 문제에 관여했다. 堀도 또한 균전체제를 중국고대노예제의 최종형태로 봤다. 그리고 周藤吉之들의 연구에 의거해 균전체제의 해체에 의해 전개된 전호제(佃戶制)를 봉건적 토지소유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식으로 당송변혁은 기본적으로 고대노예제사회에서 중세봉건제사회로의 전환이라는 것이 되지만 그래서는 중세봉건제의 권력체계인 송조(宋朝)이후의 국가는 어찌하여 이전에 內藤이 군주독재체제정치라고 부른 바와 같이 집권관료제국가를 형성하는 것일까. 50년 당시 堀은 이 문제를 해결내기 위해 힘썼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황건의 난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은 고대농민의 투쟁의 격렬함 때문에 전주(田主: 地主)계급은 강력한 집권국가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균전체제 붕괴 후에도 봉건적 관계가 좀처럼 성립하지 못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이렇게 해서 당대까지를 고대라 하는 시대구분설이 성립했다. 이 단계에는 노예제―봉건(농노)제라는 생산양식상의 개념이 시대구분의 열쇠가 돼있어 이러한 보편적 범주로 중국사를 파악해 가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이윽고 50년대 후반 西嶋가 스스로 노예설을 철회함을 계기로 이 노선은 크게 무너지나 그것을 다시 일으킨 것이 西嶋의 개별인신적지배(個別人身的支配)라는 개념이다. 국가〓황제권력이 인민 하나하나를 인신(人身)적으로 보고 거기에 한대의 기본적 계급관계가 있다는 것이 西嶋의 설이다. 이것은 이른바 총체적 노예제(總體的奴隸制)를 변용한 것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노예제라고는 규정돼 있지 않고 일종의 독특한 고대제국 지배체제로 돼있어 거기에 중국 고대제국시대의 고유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렇다면 육조․수당시대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이해돼야 할 것인가. 이 과제를 추구한 이가 그 후의 堀敏一이었다. 堀의 견해를 한 마디로 말하면 수당의 이른바 균전체제는 한 제국의 붕괴에 의해 일단 약체화한 개별인신적 지배가 그 후의 과정에서 재건됐다는 것이다. 그 사이, 즉 육조시기에 출현하는 각양각색의 새로운 현상, 이를테면 귀족제, 구품관인법, 촌락, 신분제 등등, A설이 중세적 현상으로 생각해 왔던 것의 의의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堀은 국가가 그들 국가의 바깥부근에 생겨 일어난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지배체제 안에 넣고 수용하여 개별인신적 지배의 재건을 성취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1960―70년대를 통해 이루어진 堀의 견해는 『均田制の硏究』――中國古代國家の土地政策と土地所有制――(岩波書店, 1975년)등에 집약되어 있지만 그것은 西嶋의 『中國古代國家の形成と構造』――二十等爵制の硏究――(東京大學出版會, 1961년)와 어울러져, 말하자면 시대구분론 B설을 재건하는 결과가 됐다. 거기에서 일관한 중심이론은 진한에서 수당까지의 시대를 국가권력과 자작소농민(自作小農民)과의 관계를 기초로 삼아 파악하는 데 있어 그 의미에 있어서 이 시대를 고대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 고대가 당대이후 중세를 향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두고자 한다. 고대에서 중세로 향하는 지표는 堀에 의하면 공사(公私)의 생산관계가 토지소유를 매개로서 성립하는 점에 있다. 공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양세법(兩稅法)의 성립이고 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호제의 발전으로 파악되어진다. 역으로 말하면 개별인신적 지배란 이 같은 토지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직접적인 지배․예속의 관계이며 그러한 의미로 노예제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A․B 양설의 대립점을 모아서 말하자면 진한에서 육조로의 이행과정에 시대의 질적인 변화를 인정하는가 어떤 가로 양설은 굳게 대립한다. 그리고 그 견해의 갈림길은 육조의 귀족을 협의(狹義)의 황제권력의 바깥쪽에 위치해 이것을 초월하는 권위로 보는가, 혹은 궁극적으로 황제권력에 포섭된 관료의 하나의 형태로 보는가 라는 점이다. 전자의 입장에 서면 정치는 중세귀족정치로 표현됨이 어울리고 후자의 견해에 따르면 정치는 고대전제정치로 귀결된다.
귀족제와 관료제와의 관계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도 다시 다룰 셈이지만 육조․수당시대에 관한 이 두 가지 견해는 그 내용으로 들어서 보면 결코 ‘녹슬어 엉겨붙은 두 개의 철로(さびついた二本のレ―ル)’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현대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B설의 고대 전제정치설은 이 시대만이 전제정치였다는 것이 아니라 송대 이후의 중세봉건시대도 이를테면 중세전제정치의 시대이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청말까지 지속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체제가 근대에 가까워져서 부정되어 감은 이른바 ‘서양의 충격(西洋の衝擊)’을 통해서 있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A설은 육조․수당시대에 황제권보다 자립한 귀족계급의 존재를 중시해 이를 근거로 해 이 시대를 중세라고 규정했다. 그 후의 근세사회에선 귀족의 자립한 세계는 소멸해 군주독재체제로 변화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서민의 대두가 있었다. 이 서민계급이 자립한 세계를 획득한다면 그것은 근대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세시대에 근대사회로의 자생적인 기울어짐을 보려 하는 데에 A설의 특징의 하나가 있다. 그리 생각하면 ‘서양의 충격’에서 충격이란 말은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중국사회는 그 근대화를 스스로 형성해 온 ‘근대적’사회로의 융합 위에 실현돼간 것이 될 것이다.
중국의 장래는 어떠한 체계로 굳어질 것인가. 그것은 현대학을 전공으로 하지 않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관심사이긴 하나, 시대구분론은 올바르게 그 과제에 긴밀하게 관계하는 의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왜 이제까지 약 20년간 방치되어온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연구자의 문제관심이 현실세계에서 떨어져 자기의 개인적 흥미에 가까워진 데에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것은 70년, 80년대의 냉전체제의 고정화, 그리고 양진영의 사회발전의 침체가 탈 이데올로기, 탈 사회의식을 재촉한 일과 관계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냉전구조의 해소는 전에 없던 사회의 流動化를 낳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의 사고도 자유롭고 활달한 작풍(作風)을 요청하고 있다. 필자는 과거의 시대구분논쟁에 향수를 느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담겨져 있는 여러 문제가 반드시 철저하게 소급되지 않은 채로 새로운 방향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파내면서 그 현대적인 과제를 해명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음절에서는 문제를 몇 가지의 과제로 나눠서 앞으로 추구되어야 할만한 방향을 생각해보고 싶다.
三. 귀족제의 기원과 관료제
 
앞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육조귀족제(六朝貴族制)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견해를 크게 나누는 갈림길이었다. 만약 육조귀족이 봉건영주라면 문제는 그다지 심각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육조귀족은 제왕조의 관료로서 지배층으로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귀족층이라곤 해도 그 지위의 근원은 황제권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같은 견해가 나오는 것은 당연해서 분명 B설의 계열에 속할 리 없는 矢野主稅가 이 관점을 제일 뚜렷하게 표명했다. 矢野는 말하길, 육조귀족의 경제적 기반은 봉록(俸祿)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보면 육조귀족은 진한의 관료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越智重明도 矢野만큼 과격하지 않지만 육조귀족의 관료적 성격을 중시했다. 矢野와 越智사이에는 상이점도 있어 논쟁도 행해졌지만 양자의 설은 황제권에 기생해서 일어난다는 의미로 기생관료론(寄生官僚論)이라고도 불려 A설에 속하는 川勝義雄들의 비판의 대상이 됐다.
육조귀족의 왕조관료적(王朝官僚的) 성격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가 있어 西嶋定生, 森三樹三郞, 宮川尙志 등이 모두 이 점을 언급했다. 단 森과 宮川은 귀족들이 관료라는 걸 인정한 다음에 그 문인적(文人的) 자질의 중요성도 피력했다. 그러나 요약해 말하자면 A․B양설에 속하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인식 위에 서 있어 宮崎의 󰡔九品官人法の硏究󰡕도 또한 그 예외가 아니다. 그럼 왜 이와 같은 사실인식에서 커다란 분기가 생긴 것일까.
이 의문에 접근하기에는 오히려 A설의 사람들의 의견, 다시 말해 육조귀족의 자립의 근거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육조귀족제가 신분제에 의해 받쳐지고 있어 그 신분이 황제권에 의해서도 변경될 수 없었다는 설에는 이미 청대(淸代)의 조익(趙翼)들에 의해서도 주장되고 있었다. 內藤湖南이 그것을 크게 참고로 삼았다는 것도 의심할 바가 없을 것이다. 단지 그 계급적 자립의 근거를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역시 현대 역사학의 추구과제였다. 앞에서 기술한 듯이 宮崎는 귀족의 대토지소유의 방식을 논해 이것은 중세장원과 다르다고 단호하게 하였으나 그걸 가지고 귀족계급의 자립성을 생각하진 못한다. 宮崎가 그것을 논한 것은 유물사관(唯物史觀)적 경제결정론의 입장에서가 아닌 이 시대의 시대적 특징을 토지소유 면에서 설명하려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토지문제를 다룬 까닭은 유물사관에 의거한 B설에 대해 대항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되어진다. 사실 宮崎자신도 귀족〓관료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서 구품관인법의 해명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럼 구품관인법 안에서 육조귀족의 계급적 지위는 어떠한 모양으로 보여지고 있을까. 宮崎의 연구가 관품(官品)과 鄕品(이 용어 자체는 宮崎가 만들어낸 말이다)과의 제도적인 대응관계를 해명한 일에 의해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새삼스럽게 설명할 것도 없으나 거기에서 보게 되면 향품이야말로 육조귀족에게 관료의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적 근원이다. 그리고 그 향품은 이른바 鄕論(鄕評)에 기초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향론이야말로 육조귀족이 관료의 모습을 띄게 함에 있어 정치적 지배층답게 만드는 기초가 아닌 것일까. 하기는 향론도, 또한 향품도 반드시 순수하게 지방여론이 반영된 게 아닐 수 있다. 거기에 제도적인 변용이 가해졌다는 것도 당연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그러한 세부적인 운용실태가 아니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후한말에서 양성되어 온 인물품평(人物品評)의 바람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지배층을 정치사회의 표면에 나오게 한 것이라고 생각해야되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이걸 주장한 이가 川勝義雄이었다. 그 중세론의 근간은 당시의 사회여론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었다. 여론이 정치의 동향을 크게 좌우한 사실은 岡崎文夫, 󰡔魏晋南北朝通史󰡕도 누차 지적하고 있었지만 川勝은 그것을 사회사적 수법으로 파악, 후한에서 위진에 이르는 정치과정 안에서 육조귀족제의 성립사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鄕論은 지방사회에서 중앙정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차원에서 작용했다. 川勝은 그것을 향론환절(環節)의 중층구조라고 부르고 있다. 향론에서 문제된 것은 대상자의 덕행과 재지(才智)였다. 이것은 지도자로서 백성 위에 서는 자의 자격을 평가하는 데서 유래해서 당연히 향거리선(鄕擧里選) 안에 잠재적으로 작용하고 있던 것이지만 제도의 표면에 나온 것일 것이다.
그것이 표면에 나온 것은 한 제국의 쇠퇴와 동시에 민간에서 ‘자율적(自律的)’으로 평론하는 풍조가 강한 힘이 돼 작용하기 시작함에 의해서다. 이렇게 보면 향론은 본래 넓은 뜻으로 보면 관료정치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이 구품관인법에서 관리등용법 안에 제도로서 단단하게 자리잡는 것도 당연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봐 오면 육조귀족의 계급적 자립의 근거는 A설에서도 관료제사회와 관계가 없다고 말해지고 있는 게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A․B 양설은 관료제사회를 공통의 장으로 하면서 육조귀족의 지위가 군주권의 일환인 것이나, 혹은 거기에서 자립한 데에다 발판을 두는 것인가라는 점으로 서로 반대방향으로 한 개의 밧줄을 끌어당긴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줄다리기에 대해 관객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 척 보기에 이해하기 쉽다는 점으로 말한다면 B설 쪽이 훨씬 용이하다. 왜냐하면 육조귀족이라곤 해도 관료이며, 관료는 본래 군주의 손발이기 때문이다. 한편 A설은 관료이면서 자립적이라는 언뜻 보기엔 모순인 설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구품관인법에 있어 향론의 역할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제도자체가 모순이 되어버려 B설의 논리 그 자체에선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B설에 의해 그것을 설명한다면, 이를테면 향론을 거두고 관료제를 재편․강화했다는 식으로 정치기술론적인 설명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문제를 깊게 하기 위해 몇 가지는 A설 쪽으로 기울어서 논술하는 것을 허락 받고 싶지만 이런 일은 학설에 모순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실체 그 자체가 모순 위에 이루어져 있는 것인가. 문제는 이러한 첨예함을 가지고 우리들 앞에 닥쳐왔다. 게다가 우리들 눈에 모순으로 비추는 것이 실은 중국사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아닌가라는 것에 생각을 미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향론이라는 특정한 개인의 인격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그 사람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사회의 기본적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川勝의 중세론은 이러한 인식 위에 만들어져 있으나 川勝들과의 공동토론 중에 필자가 구상해온 호족공동체(豪族共同體)설도 지방사회의 기층(基層)구조가 역시 마찬가지인 방식으로 성립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도 한 가지 모순적 구조가 있다. 이 설로는 호족과 향민(鄕民)이라는 계층관계 안에서 양자의 인애(仁愛)와 경앙(景仰)의 관계가 향당(鄕黨)사회의 결성을 만들어내고 있긴 하나 인간의 도덕의식에 그 같은 사회구성력이 있는 것일까라는 것이 이 설에 대한 대다수 비판의 취지였었다. 그러나 사서는 종종 그것을 증명하는 듯한 사실을 말하고 있어 거기에야말로 육조사회, 나아가서는 중국사회의 특징이 있는 게 아닐까. 졸론(拙論)이 불합리하게 보임은 근대일본의 ‘합리성’에 있어서 이해하기 곤란한 성질이 중국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는 여기서 이전 拙論에 가해졌던 비판에 대해 변명을 시도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A․B 양설의 대립점을 더듬어 가면 위와 같은 심각한 문제에 맞부딪치는 것을 여기에 지적해두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당시 사회여론이 개인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 거기에 해당인물이 속하는 가계(家系)의 모습이 자주 엉겨붙는 일은 육조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벌귀족제 성립의 본래 근원이라는 것도 자명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있어서 개인관은 근대에서의 그것과는 달리 가계를 전제로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시에 개인은 말하자면 가족적 개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 개개인은 가족 안에 딱 매몰돼 있는 건 아니다. 육조귀족에서 보여지는 그 개성적인 모습은 그걸 보여주고 있다. 즉 특정의 가계에 속하고 있다는 것과 개별적 존재라는 것은 이 시대의 인간존재의 양 측면이라는 걸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전자로 기울 때 문벌주의로 기울어 그것을 구해내려는 때 현재주의(賢才主義)가 주장된다라는 식으로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인가. 여하튼 육조시대가 문벌귀족의 시대라는 것은 자명하게 하면서 그것을 현상해 가로채는 인간관의 차원까지는 좀처럼 내려서지 않았다는 것이 전후 이래의 육조귀족제 연구의 실상은 아닐까. 특히 육조귀족의 자립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이 문제의 구명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A설은 거기까지 구명의 메스를 넣는 일이 없었고 B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생겨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A․B 양설의 쟁점의 연장선상에는 이 시대의 인간존재의 문제가 가로놓여져 있어 귀족제의 문제는 결코 끝났다고는 말할 수 없다.
 
四. 호한(胡漢)문제
 
귀족제의 문제는 황제정치의 중국왕조내부에서 어떠한 모습인가 하는 문제도 있지만 세계통치를 지향하는 황제정치는 주변의 제 민족과도 필연적으로 관계를 가진다. 시대구분론의 A․B 양설에서 본다면 이 호한(胡漢)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앞에 기술한 대로 內藤湖南은 이 관계를 시대구분을 하는 하나의 견지로 삼았다. 단적으로 말해 버리면 중국의 고대는 한에서 호(胡)로의 문화의 확대발전이며 중세는 역으로 한문화의 영향을 받은 호족(胡族)의 중국내부로의 진출의 시대였다. 이 흐름의 반전에는 후한중기―서진(西晉)이라는 약 200년에 이르는 과도기가 있어 이 시대에는 한에서 호에 미치는 흐름은 일시 활동을 정지했다고 한다.
요컨대 중세는 胡漢관계에서 볼 때 胡漢의 적극적 활동의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변화를 오게 한 배경에는 한족의 문화의 발전과 정체와 함께 호족의 민족적 발흥이 있다. 한 제국의 쇠망은 여기에서도 시대전환의 커다란 계기였다.
內藤의 시점을 이어받은 宮崎는 한족의 문명주의와 호족의 소박주의(素朴主義)라는 대비관계를 설정해 전자에 의한 퇴폐를 후자가 극복해 간다는 도식을 세웠다. 宮川은 육조시대에서 호족의 활동을 로마말기의 게르만의 건국에 견주었다. 필자자신은 호족의 부족공동체가 중국사회에서 변질해가 한족사회의 문벌주의를 뛰어넘어 수당제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과정을 서술했다. 吉川忠夫는 이 시대에 역외(域外)인 인도를 中土(세계의 중심)로 하고 중국을 변토(邊土)로 하는 의식변화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시각들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다 진한의 한족중심주의의 세계가 육조에 이르러 상대화(相對化)되어 감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A설의 중세론의 한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나 그럼 B설의 입장에선 이 문제는 어떻게 파악되어지는 것일까.
전후의 중국사연구의 하나의 추세는 동아시아론일 것이다. 거기에는 일본사 분야에서 「국사」학의 독선성(獨善性)을 배제하고 동아시아라는 장(場)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는 자각이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앞서 기술한 前田直典의 논설도 이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나 이것을 사실(史實)과 논리의 양면에서 학설로서 제출한 것이 西嶋의 책봉체제(冊封體制)론이다. 책봉이란 주변제국(諸國)으로 한정해서 말하면 중국왕조가 「제국의 군주에 중국왕조의 관호(官号)․작위를 내려 외신(外臣)으로 삼는 일이다」. 그 원리로서는 「한대에 제정된 화이사상(華夷思想)과 봉건사상이 응용」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해 주변제국이 중국왕조와 군신관계를 맺는 일에 의해 여기에 「동아시아세계」라 부를 만한 통일된 정치적 세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책봉관계는 일찍이 한대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부분적인 것으로 멈춰있어 이것이 전면적으로 동아시아전역에 전개되는 것은 육조시대라는 것이다. 한왕조의 군현제시행이 동아시아 제 민족에 자극을 주는 한편 이에 대한 반항을 야기해 여기에 책봉이라는 형식에 의한 중국왕조의 간접지배체제가 전면화했다는 것이다.
西嶋에 의하면 이 책봉체제는 당대까지 존속하나 당조(唐朝)의 쇠퇴는 한편으로 주변 제 민족의 자립을 재촉해 이른바 정복왕조시대를 출현시킨다. 송왕조는 그들 제 민족의 종주국은 아니게 됐지만 동아시아세계가 중국을 중심으로서 있는 종(種)의 통일체를 유지한다는 상태는 전과 다름없이 존속했다. 그 통일의 중점은 중국의 경제와 문화의 발전에 있어 明왕조는 다시 그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했다고 한다.
그럼 주인(主)으로서 육조시대의 중국왕조와 주변민족과의 관계에 대해 內藤을 비롯한 A설의 견해와 西嶋의 책봉체제론을 함께 보면, 전자는 말하자면 화이(華夷)에 관계되는 운동론이고 후자는 화이 사이의 질서론이다. 따라서 후자에선 종주국이 호족국가라 하더라도 중국왕조로서 예(禮)에 의한 군신관계를 타국과 맺는다면(이를테면 慕容燕과 高句麗) 여기에는 역시 책봉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양설은 정면으로 대립하는 관계는 아니다. A설의 입장에 서더라도 동아시아제국(諸國)간의 정치질서를 책봉관계에서 파악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한편 西嶋이 주장하는 내용도 A설이 설명하는 주변민족의 대두를 육조시기의 특징의 하나로 삼는 걸 고려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설 사이에는 역시 발상 위에 커다란 상위(相違)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다. 그렇다는 것은 A설에서 말하는 화이관계의 역전이란 진한의 정치원리가 좌절해 그 경향을 바꾼 것과 상응하지 못한 현상이다. 이에 대해 西嶋의 책봉체제론은 황제가 신하에게 부여해 그 지위를 규정하는 일, 고대작제(古代爵制)의 연장이어서 그것은 진한(秦漢)적 정치체제의 연장이다. 한대에는 관작(官爵) 외에 특히 개별인신적 지배도 또한 민작(民爵)의 부여에 의해 보증됐다고 하는 西嶋의 설을 여기서 상기하고 싶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세계의 형성은 역시 한대(漢代)적 정치논리에 의해 형성된 것일 것이다.
이리하여 동아시아세계의 형성문제도 또한 중국사의 고대적 발전의 연장으로 봐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 굴절 위에 생겨났다고 풀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 일은 조선반도와 일본열도의 국가형성 모습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관계될 것이다. 前田直典은 중국, 조선, 일본의 역사발전의 병행성(竝行性)이라는 시점으로 7-8세기의 그 나라들을 모두 다 고대라고 단정했지만 만일 이 때 중국이 중세적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조선․일본의 고대국가의 형성과정에 중국의 중세문화가 농후한 영향을 끼친 게 되어 이것이 중국문화 수용이라는 문제를 낳고 혹은 그 후의 국가발전의 성격을 크게 규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 대해서의 검토는 아직 이뤄지지 않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단지 필자가 이전에 언급했던 걸 들자면 책봉이라고 해도 한대의 그것과 육조이후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라졌다. 한대에는 작위만이 주어졌던 데 비해 육조에 들어올 무렵부턴 작위와 관호 양쪽을 주는 것이 보통이 된다. 이 관호는 도독모모제군사(都督某某諸軍事)처럼 중국 내지(內地)의 이른바 내신(內臣)에게도 주어졌던 것과 공통하고 있어 내신과 외신의 구별이 애매해짐을 느끼게 한다. 이 외신의 내신화(內臣化)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야말로 육조시대의 호한관계의 변용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되어진다.
A설에 의하면 육조귀족은 본래 군주한테서 내려진 관작에 의해 귀족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인격에다 가계(家系)적으로 갖춰져 있다고 여겨지는 권위를 황제가 승인해 귀족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로 보면 육조귀족에는 외신적인 일면이 있다. 그 반면 이 시대에는 호한의 국경이 희박하게 돼 호족의 왕 또한 중국황제의 내신이 되는 위치에 접근해 왔다. 그들이 지배층으로서 스스로를 표현할 대 그것은 중국풍의 관료귀족의 자태를 취한다. 즉 귀족제는 안팎(內外)으로 공통의 정치적․사회적 체계로서 동아시아로 보급된 것은 아닐까. 그것이 당시의 세계에 문화의 공통성(귀족문화)을 구현한 건 아닐까하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위와 같은 식으로 봐 보면 A․B 양설의 관점의 상이는 호한문제 내지 동아시아세계론에도 확실하게 스며들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 상이점 또한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도 명료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당대에까지 연장해서 검토해 보자.
당대에 이민족통치로서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 이른바 기미주(羈靡州)체제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것인가. 堀敏一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방식(기미주체제)은 전대의 통혼(通婚)정책이나 책봉관계에 비교한다면 중국국가의 지배가 이민족에게 한층 강력하게 미치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대의 「책봉 같은 군주와 군주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가 아닌 체계적인 관료체제인 것이다」이라고 하였다. 전대, 다시 말해 육조까지의 책봉을 호한의 군주간의 개인적인 관계로 보지 않음이 좋은가 어떤가. 역으로 말하면 기미주체제가 근본적인 관료체제라고 함이 어울리는 것인가 아닌가. 결코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언뜻 보기에 개인적 관계야말로 당시의 공적관계이며 그 점에선 기미주에서 황제와 刺史(사실적으로 말하면 족장)의 관계도 또한 堀이 말한 개인적인 관계를 배경으로 성립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堀은 기미주에 적용된 주현제(州縣制)를 중앙집권적 관료제지배라는 측면에서 보고 있으나 주(州)자사는 즉 족장이라는 기미주의 특질에서 생각한다면 주자사는(다른 작위도 포함해서) 오히려 족장층의 자립형식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중국내지에서 유사한 예를 찾는다면 육조시대에서 자주 보여지는 지방귀족의 본적지임용에 상당한다고 하겠다. 요컨대 기미주체제란 唐朝의 제국(帝國)지배와 주변민족의 자립과의 조화의 산물이며 이 조화가 무너진 데에 기미주체제 파탄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민족의 자립성은 거기에서 더욱 신장해 이른바 정복왕조의 형성에 가까워져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A설 측에선 기미주체제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은 없지만 A설의 관점을 적용해 가면 위와 같은 논의를 낳게 될 것이다. 왜냐면 A설에서 중세의 주인공 중 하나는 중국내지에 대해 구심적(求心的)으로 활동하는 주변민족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주변민족을 중원왕조의 지배대상으로 파악하는 B설과는 역시 관점의 차이가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五. 수당제국의 성격을 둘러싸고
 
앞에서 기술했듯이 B설에 의하면 수당제국은 진한에서 시작하는 개별인신적지배가 재편된 국가이다. 그 재편을 실현하기 위해선 육조귀족의 자립성을 배제하고 그들을 황제에 대한 종속성을 강하게 한 관료로 만들어 정권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국가는 탈(脫)귀족제국가로 변화하는 것이어서 국가와 귀족제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된다.
이에 대해 A설의 수당제국이해는 짧게 말하면 귀족제국가설이다. 문벌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고는 했지만 본질은 여전히 귀족제국가라는 틀 안에 있다는 것이 內藤이래의 이해였었다.
이 대립하는 두 견해를 함께 보면 여기에도 갖가지 과제가 가로놓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그것들을 각각 보강해야만 하는 문제점이 있다. 전자 B설의 경우 수당의 황제권(皇帝權)이 귀족제를 눌러 그들을 복종시키는 수단이었다고 한다면 그럼 이 황제권은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수당국가가 북조(北朝)를 원류로 하는 호족적(胡族的) 색채(요소)가 강한 정권이란 건 위의 사실을 증명하는 데 유력한 수단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한족간에 발생한 귀족제국가의 흐름이 이것에 의해 단절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布目潮渢은 수당양조(兩朝)의 기원을 서위(西魏)․북주(北周)로 보고 그러한 설을 제기했다. 內藤湖南이 수당은 과거제․부병제(府兵制)등의 제도에 의해 문벌주의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다고 기술한 것을 布目은 민족의 차이에 근거해서 그 나라들이 종래의 귀족제국가와 이질적임을 강조한 것이다.
布目이 B설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보는 것은 적당치 않을 지도 모르나 적어도 이 설이 수당〓귀족제국가설에 이의를 제기한 건 분명하다. 그러나 서위․북주정권은 陳寅恪이 설명한 바와 같이 호한합작(合作)정권이어서 단순한 호족정권이 아니다. 이 양 정권에도 중원왕조로서 일정한 역사성이 각인되어 있다. 다시 말해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의 한화(漢化)정책에 출발이 되는 탁발(拓跋)정권의 변질․해체의 한 결과가 서위․북주정권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것도 또한 귀족제와의 관계를 통해 해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자신은 거기에 문벌귀족제 극복이 양 왕조의 국가의지로서 관철돼 그것이 수당으로 이행해 갔음을 논했다. 필자의 생각으론 그 극복은 문벌주의의 극복이고 귀족제 그 자체는 현재주의(賢才主義)의 이념에 의해 사라지지 않고 살아갔다. 즉 현재주의의 이념에 의해 호한의 한문(寒門)이 문벌귀족출신자와 같은 수준으로 지배층을 형성하는 일이 가능하게 됐다. 이것을 필자는 신(新)귀족제라고 불렀다.
이 신귀족제를 국정상 문무양면에서 받쳐주는 것으로 內藤이 지적한 과거제와 부병제가 있다. 필자는 부병제의 기원을 호한의 향병(鄕兵)에서 찾았으나 그것은 이전에 귀족계급의 지반(地盤)이 되었던 향리공동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단지 그 담당자가 한문(寒門)층으로도 확대된 것이다.
이와 같이 신귀족제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수당제국의 「전제(專制)」적 성격과 귀족제적 성격은 어느 정도 통일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그게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 학계의 검증을 받아 왔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수당제국의 성격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의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정치원리를 구명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B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개별인신적지배론에 있다. 그리고 개별인식적지배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균전제의 급전이 정남(丁男)을 대상으로 행해진 것과 조용조잡요(租庸調雜徭)의 수취가 마찬가지로 정남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 거기에 역역(力役)의 과중, 호적제도 등에 의한 민중 각 개인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해 줄 것이다. B설의 이런 기본개념에 대해 A설이 정면에서 검토해 온 건지 좀 의심스러우나 그것이 A설의 발상이 다른 것만은 확실하다. 일찍부터 內藤湖南은 균전농민을 거주와 토지소유의 양면에서 제한된 부자유민(不自由民)으로 생각, 그것이 양세법(兩稅法)에 의해 자유화됐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균전농민의 부자유민으로서의 지위에서 중세 민중의 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더 말하자면 그들은 국가의 관리를 받는 농노계급이었다. 이 생각은 개별인신적지배설과는 직접 맞물리진 않으나 여기서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 국가와 농민가족과의 관계일 것이다. 한편 개별인식적지배설에선 각 농민가족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이른바 정조법(丁調法)은 육조시기의 호조법(戶調法)을 기원으로 하는 호조법의 발전형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인정대상(人丁對象)이란 급전․징세(徵稅)의 산정방법을 나타내는 데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균전시대의 농민이 소가족생활을 영위하는 데 인정(人丁)없이는 그들의 현실생활이 있을 수 없다는 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수당의 균전제나 조용조법이 人丁을 계산단위로 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평균이란 이념에서 나온 산정형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개별인신적지배의 지표로 하는 것은 형식과 원리가 혼동돼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개별인신적지배설에도 아직 검토의 여지가 없는 게 아니다. 더욱이 해명되어야 할 일은 당시의 농민에게 있어 국가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냐는 문제이다. 堀은 말하길 수당의 균전체제는 육조시대의 호족(豪族)의 향민에 대한 관리, 보호시책을 호족이 대신해서 실행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향민이 호족에 대해서 느끼고 있던 은의(恩義)를 국가에 대해서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농민의 국가와의 관계를 규정해 가는 일은 이러한 문제의 검토가 여전히 남겨져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왕조의 변질과 몰락의 과정은 논쟁시대에 커다란 관심을 끌었던 과제였었다. 당송변혁기를 어떻게 성격지을까에 관계돼 있기 때문이다. 무주(武周)혁명, 안사(安史)의 난, 번진(藩鎭)과 당쟁, 그리고 당말의 파란과 많은 노작(勞作)을 낳게 했다. B설의 입장에서 이들 문제의 일정한 순서를 정한 이는 堀이었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註(16)) 堀은 번진이나 반란세력을 고대사회극복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그것은 아직 가부장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해 봉건권력으로의 성장은 불충분했다. 그리고 그 불충분함이 송의 집권관료제를 낳은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西嶋의 구설(舊說)에 대응해서 제기된 것으로 개별인신적지배를 강조하는 설이 나오기 이전의 설이다.
필자도 번진체제에 대해서 몇 가지 발언을 시도했다. 필자는 당의 중앙집권체제 안에서 번진이라는 돌연변이가 태어난 일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그것을 분석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꿔 말해 이를테면 하북삼진(河北三鎭)이 왜 이러한 당조(唐朝) 중앙에 대해 자립적이었나 하는 문제를 실태에 맞게 구명하는 일이다. 그 결과는 아군(牙軍)의 병사끼리의 이익을 똑같게 하는 결합이 번사(藩師)를 받들게 하고 또 이해가 대립하면 번사를 추방했던 것이어서 거기에는 가부장제라기보다는 민중의 자립적 세계의 맹아(萌芽)가 느껴진다. 공민제(公民制)――가부장제――봉건제라는 식으로 사전에 도식을 세워 당송변혁을 성격 짓는 것은 역사분석의 방법으로서도 적절하지 않다.
눈앞에 놓여진 사실(史實)을 분석해 거기에서 자유롭게 논쟁화해 송대에 대한 전망을 개척해 내는 일이 필요한 시기에 와있고 이 말은 당연히 A설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다.
 
六. 끝으로
 
이상은 시대구분논쟁에 관계한 문제를 그것도 극히 한정된 주제에 국한해 소개, 고찰한 것이다. 이것말고도 다뤄야할 사항은 매우 많지만 지면 사정도 있으므로 그것은 각각의 분야에 대해 기술되는 각론(各論)을 통해 봐 주었으면 한다.
또 하나 독자의 양해를 얻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당초의 집필계획에선 80년대 이후에 전개되는 연구성과들도 시대구분 문제에 관계시켜 다루어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조금 해보니 단시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것은 글 첫머리에 기술한 80년대 이후의 연구경향과 무관계하지 않다. 그렇다는 것은 세분화된 실증연구가 이를테면 시대구분과 같은 대국적인 문제를 의식하지 않고 있는가 어떤가 판정이 심히 곤란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80년대 이후의 개별연구에도 전후(戰後) 연구의 흐름에 부합되는 경우가 적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전처럼 자기의 연구를 이제까지의 연구성과 안에 자리잡게 하고 그 독창성을 주장하고 그리고 그것을 중국사의 커다란 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명확한 제언이 모자란 까닭에 그 의의를 객관화하는 일이 심히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또한 필자의 인상비평(印象批評)에 지나지 않지만 다루어지는 주제는 종래의 연구사를 계승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앞의 사람들이 만든 틀 안에서 이것을 추인(追認)하거나 혹은 사소한 부분의 수정을 시도하는 연구의 정체화(停滯化)와 쇄말화(瑣末化)를 느끼게 한다. 바꿔 말한다면 중국사를 어떠한 원리로 파악할까 하는 자세가 희박하게 된 건 아닐까하는 기우(杞憂)를 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구분논쟁에는 이념 쪽이 선행하는 좋지 않은 경향이 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80년대 이후의 새로운 경향은 이에 대한 반성․비판이었다. 거기에서 종래에 없는 새로운 주제가 개척된 일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육조․수당전시대를 통틀어 국가의 여러 제도(관제, 선거, 의례, 제칙(制勅), 율령 등등)의 연구, 지역사, 특히 돈황(敦煌)․투루판(吐魯番)사회의 연구, 도성사(都城史)의 연구 등은 질과 양이 함께 크게 진전해 도교와 불교사 분야에도 심층 깊게 연구가 개척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연구를 촉진한 것은 대량의 문물발견과 그 이용이다. 육조․수당사의 연구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새로 나오는 자료의 이용 없이는 불가능한 정황을 나타내고 있고 바로 거기에 80년대 이후(즉 문화혁명이후)의 커다란 특징이 있다.
그렇지만 장점은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처음에 사료가 있어야(初めに史料ありき)”라는 입장에서는 사료소개는 되더라도 역사논문은 생기기 어렵다. 사료의 한편 끝에는 역사가의 통찰력과 구상력(構想力)이 있어야 한다. 그 통찰력과 구상력은 실증주의(positivism)를 뛰어넘어야 생기는 것이다. 감히 고언(苦言)을 드리자면 최근 수년동안의 연구의 세분화(細分化)라고 불려진 것은 전망을 가진 세분화가 아니라 목표를 잃은 데서 오는 세분화일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80년대 이후의 새로운 연구도 그 자체는 아주 정치(精緻)하고 그 가치는 추호도 의심할 바가 없으나 그 연구들이 고유의 체질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중국사회에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결코 알기 쉽진 않다.
논쟁이후의 연구에 대해 언급한 게 적어 「總說」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한 걸 독자들에게 깊게 사과하고 싶다. 또 다분히 편견을 섞어서 기술한 게 있다는 걸 각각의 저자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다. 단지 필자로서는 그들의 태만이나 편견․독단으로 질책을 덮어씀을 두려워 않고 여전히 내가 생각하기에 미련이 있는 부분에서 받은 인상을 같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생각에 부족하지만 초고를 쓰게 되었다.
 
(* 谷川道雄, 󰡔魏晉南北朝隋唐時代の基本問題󰡕, 1997, 汲古書院, pp.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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