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추가
강의실 중국사학사 왕부지 자료실
이윤화교수의 중국사학사 공부방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현재접속자 l 최근게시물
위진남북조사 공부방 커뮤니티
  최근 7일동안의 인기검색어 입니다. 최종  삼국지  사관  사기  ??  비교  비판  공자  최종보고서  유형  
ID 
PW 
자동로그인
회원가입  ID/PW 찾기
강의실
  동아시아 고대의 세계
    자료실
    보고서 모음
  동아시아 중세의 역사
    자료실
    보고서 모음
  중국생활문화사
    자료실
    보고서 모음
  중국사상사
    자료실
    보고서 모음
  역사학개론
    자료실
    보고서 모음
  중국.중국인.중국문화
    자료실
    보고서 모음
HOME < 강의실 < 동아시아 중세의 역사 - 보고서 모음
동아시아 중세의 역사 - 보고서 모음
 
작성일 : 17-06-20 00:35
(14주) 번진병사와 영민의 움직임
 글쓴이 : 15박복균
조회 : 449  
번진병사(藩鎭)와 영민(領民)의 움직임
20150088 박복균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 원인
 
*선여(羨餘)의 폐
 
선여란 영민으로부터 수취한 세전물 중 번진내부를 운영하고, 중앙정부에 상공으로 충당하고 남은 나머지를 말한다. 당시 번진에서 선여를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정해진 상공과는 별개로 중앙정부에 진봉(進奉)으로 보냈다. 당시 당왕조 중앙정부에서 쓸 경비가 많아 진 것에 비해 국가세입 중 큰 부분을 차지했던 소금전매수익은 9세기 초의 반 이하로 크게 떨어진 상황이었다. 당연히 중앙정부는 진봉에 의지하였다. 선여는 중앙정부 측에서 절도사들의 업적을 재는 기준이 되었고 절도사들 또한 중앙정부의 요구에 맞춰주기 위해서는 영민에게서 거둬들이는 양세전물만으로 한계가 있어서 수탈을 더욱 강화했고 심지어 병사의 급여를 삭감하거나 탈취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이 행해질 수 있는 배경으로는 번진개혁 이후 거의 모든 번진이 순지화 되었다.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절도사는 중앙정부와 일치하는 조직이었다. 파견된 문관 절도사는 승진을 위해 중앙정부의 요구를 맞춰주는 상황이었다.
또한 금군의 무관들은 금군을 장악하던 환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액의 뇌물을 바쳐서 절도사란 벼슬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그 전의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세금을 더욱 심하게 거두어들였다. 그 결과 국가는 어지럽게 되었고 용병 집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던 번진의 병사와 절도사 사이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심화되어 결국 번진병사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계급의 분화
 
자영소농민의 분해가 진행되면서 소농민의 몰락이 심화되고 한편 서민지주층이 발전해 가는 당 말기의 사회를 보여준다. 당시 양세법이 성립한 이후 몰락한 소농민은 장원주에 예속되어가거나 번진병사로 흡수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당나라 말기가 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민집단과 무뢰배 집단같은 비생산적인 집단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는 소농민의 급격한 몰락이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2. 강남 번진병란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보인 사례는 강남 번진병란이었다. 정부는 강남 번진이 강력한 무력집단을 가지지 못한 번진에 대해 급여를 일부 가로 채는 경
향이 있었다. 결국 858년 강남 번진에 5건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모두 선흡(宣歙)번진의 장교 강전태(康全泰:?~858)와 이유진(李惟眞:?~858), 여웅(餘雄) 세 명에 의해 지도되었다. 당시 이들 뿐만 아니라 번진 지도자들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었는데 이를 영비, 영점(影庇, 影占) 이라고 한다. 영비와 영점을 국가에서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나왔고 이후 관찰사를 파견하였고 이로 인해 그들의 이해관계가 압박을 받게 되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후 4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이 반란의 특징으로는 번진의 무력집단 뿐 아니라 수탈을 강화당한 재지 서민지주와 대상인들이 당 왕조에 대립하는 양상이 강해졌고 그간 일어났던 화북의 번진에서 특히 아중군(牙中軍) 같은 병사들이 주도한 반란과는 성격이 달랐다.
 
3. 구보(裘甫 :?~860)의 난
 
구보는 무리 100여명을 이끌고 절동(浙東)번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구보의 무리는 선여의 물자가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창고를 습격하고 그 물자로 세력을 키워 절동번진군을 전멸시켰다. 이러한 구보의 성공을 본 재지 산적과 해적, 무뢰배 집단과 먼 지방의 도둑떼가 호응하였다. 구보는 나평(羅平)이라고 하는 연호를 세워 당왕조의 지배를 거부하고 재지성이 강한 지방정권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구보의 난에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바로 당시 반란부대 지휘자인 유왕과 왕로사이의 상황 인식이 달라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과 재지성이 강한 지방정권을 목표로 하였지만 재지인에 대한 파악이 반군보다 늦게 되었고 이를 이용한 토벌군의 수장 왕식에게 진압 당하였다.
 
4. 방훈(龐勛:?~869)의 난
 
방훈의 난은 구보의 난이 일어난 지 8년 후인 868년에 무령(武寧) 지방을 무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에 무령번진이 왕식에 의해 해체되었고 이후 살아남은 군사들은 비적화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비적들을 이용하여 교병을 모집해 남조에 대처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반란의 불씨를 잠재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6년 넘게 그들은 철수명령을 받지 못하였고 이에 불만을 가져 방훈을 필두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별다른 저항 없이 주민들의 원조를 받아 서주에 복귀하였다. 그는 조정과 교병들 사이에 불신을 이용해 부하들을 선동하였고 본격적으로 정부군과 맞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왕조에 절도사 지위를 요구하였고 부유층으로부터 재산을 대부분 거두어들이고 재산을 숨기는 이들을 죽여 지주와 부유한 상인층들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절도사 지위 요구와 봉기했던 병사들이 포악해서 민심을 돌아서게 만들었고 결국 14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5. 결론
 
당왕조 후기 국가를 뒤흔들 만한 많은 반란들이 일어났다. 이 반란들은 각각 동참하는 계층이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당시 당왕조 사회의 모순 속에서 나타난 일이었다. 강남번진 병란은 이익 관계에 의해 일어난 반란이고 구보의 난에 들어서면서 이전까지 번진들에서 일어났던 병란과는 달리 소농과 빈농, 도적떼 등을 기반으로 하는 반란이 였으며, 통일왕조의 멸망 시 대규모로 일어나던 농민봉기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대규모로 일어났던 방훈의 난은 장기간에 걸쳐 싸웠고 반란의 지역이 양자강, 회하를 넘어 황하에 달하는 넓은 지역이 되었다. 이후 당나라는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당나라를 멸망시킨 결정적인 원인인 황소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참고서적
 
누노메 조후·구리하라 마쓰오(임대희),중국의 역사 수당오대, 혜안,2001
 

 
 

Total 4,339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동아시아중세사 발표주제와 순서 운영자 05-02 10870
공지 동아시아중세사 에세이 올리기 운영자 03-10 12807
4339 (최종) 당의 수도 장안(長安)의 형성과 시장 사람들 12김강민B 06-20 575
4338 (최종) 사무역의 발달과 국제정세의 변화 11김준영 06-20 515
4337 (14주) 번진병사와 영민의 움직임 15박복균 06-20 450
4336 (최종) 중국 중세 불교의 발전과 수난사 13홍연수 06-20 578
4335 (최종) 환관의 권력 확대와 유형적 반복 15박복균 06-20 489
4334 (최종) 황제의 비서실장, 환관 15김현실 06-20 483
4333 (최종) 중흥지주, 헌종 12박석우 06-20 451
4332 (최종) 중국의 불교 14금상호 06-19 436
4331 (최종)나와 다르면 틀린 것인가? 14김혜지 06-19 479
4330 (최종)중국 불교와 불경의 번역 13이한경 06-19 435
4329 (최종) 역사와 문명을 만든 길 14최수진 06-19 435
4328 (최종) 자립화 한 번진과 영국 스코틀랜드 독립의 연관성 I5김경미 06-19 424
4327 (최종) 隋의 고구려 원정 이동현 06-19 449
4326 (15주) 당송변혁 12김강민B 06-19 404
4325 (최종) 여제가 된 측천 신주연 06-19 503
 1  2  3  4  5  6  7  8  9  10    
이윤화 교수 l E-mail : yhlee@andong.ac.kr
Copyright ⓒ chinahistorio.com. All rights reserved. Since September 1,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