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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6-28 16:07
명청대의 사학
 글쓴이 : 이윤화
조회 : 6,156  
* 몇 년전 명청시대 개설서에 싣기 위해 작성한 글이다. 여전히 책을 편찬한다는 소식이 없으므로 우선 학부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여기에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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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청대의 사학
    1. 명청사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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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중국사학사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명청사학은 시대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전통사학의 다원적 계승과 종합 그리고 근대사학으로의 불가피한 전환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물론 이 시기의 사학은 한족과 이민족(몽골․만주)이 징검다리처럼 교대로 등장하는 정치환경이 다른 시대와 달리 특별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기도 한다. 사학에 대한 정치적․사상적 간섭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몽골의 지배를 극복한 명의 황제전제와 정통론을 기반으로 한 사상적 통제, 그리고 한족 왕조를 몰아내고 등장한 만주족 청의 소위 문화적 전제(專制)가 분명 각 시기 초기단계에서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분위기는 이같은 영향력을 제한적으로 작용하게 하였다.
명청사학이 지닌 전통사학의 계승과 종합적 성격은 체재와 체례 두 방면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명사(明史)󰡕와 󰡔청사고(淸史稿)󰡕의 「예문지(藝文志)」에 수록된 사서들을 살펴보면, 수량 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보이고 있을 뿐 과거 위진에서 수당에 걸치는 시기처럼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체재가 성립되고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술사의 정리를 위한 각종 “연원록(淵源錄)”과 그에 기초한 학안(學案)의 등장과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사서의 성행 등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청대의 각종 전문분야 관련 역사저술은 이 체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울러 역사지리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청 중엽이후 외세의 압력에 대한 위기감은 특히 변방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방지(方志)의 경우에도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관심 속에 정기적인 간행과 증보가 계속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두 시기 모두 정사와 “실록”의 경우 과거와 다름없이 계속 편찬되었다.
각 왕조의 정치적 수요와 함께 인쇄업과 출판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 시기의 역사관련 저술활동을 크게 자극하였고 아울러 대규모 편찬사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두 시기 모두 왕조 초기에 관찬의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였다. 대전(大全)․회전(會典)․삼통(三通) 등의 편찬과 속찬(續纂), 그리고 󰡔영락대전(永樂大典)󰡕․󰡔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의 편찬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외에도 두 시대 모두 경세적 문집(文集)의 편찬이 크게 성행하였고, 아울러 두 시기 모두 사찬 사서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한 시대였다. 특히 명대의 다양한 사찬 사서의 등장은 역사의 대상이 정치적 상층만이 아닌 사회 전반으로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체례와 관련하여 특히 명대 초기에서 중기에 걸친 시기에는 이학(理學)의 내부적 갈등이 사서 편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통론에 입각하여 정치적 목적을 지닌 각종 사서와 교과서적 성격을 지닌 서적의 편찬 등이 정주학(程朱學)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명 중엽을 거치면서 급변하는 시대적 환경은 예리한 현실인식을 불가피하게 하여 전체 학술의 경세적 경향과 함께 실증적 사학 사조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근대사학의 맹아를 충분히 예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같은 특징 가운데 보이는 근대적 성격이란 즉 봉건 전제정치를 비판하고 군주 개인의 사욕을 부정하고 분권적 “공천하(公天下)”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과 그 주장의 배후에 주자학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특히 이지(李贄)와 여곤(呂坤)․전겸익(錢謙益) 등은 과거 보지 못하던 파격성을 보였다. 특히 이지의 경우 반이학적(反理學的) 역사인식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경사(經史)를 바라보는 이같은 관념의 변화는 이미 명대에 그 싹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경학과 사학의 관계를 바라보는 변화된 시각은 청 중엽 장학성(章學誠)에 의해 “육경이 모두 사[六經皆史]”라는 주장으로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사의 문제는 물론 역사의 시비, 공과 사, 도덕과 사공(事功), 시(時)와 세(勢) 등등의 사학의 이론과 관련한 주제들이 모두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명말청초의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특히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왕부지(王夫之) 등이 주로 거론되지만 명말 양신(楊愼)․초횡(焦竑)․전겸익(錢謙益)이 보이는 파격성에도 주의해야 한다.
청대사학은 전통사학이 근대사학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 나타난 특징을 명말청초의 경세적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계몽적인 성격과 실증성을 특별히 강조하지만, 근대사학으로의 전환은 물론 명말청초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天崩地解]' 위기감이 대내외적으로 점증되던 청대 300년간의 시대환경의 결과였다. 청 초기의 문화적 전제와 대규모 편찬사업을 지나 건가(乾嘉) 연간이 되면, 허황한 이론보다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공(事功)을 중시하였고, 실증과 의리의 통일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앞서 말한 고염무․황종희․왕부지 등으로부터 중간에 호위(胡渭)․염약거(閻若璩)를 거쳐 다시 공자진(龔自珍)․위원(魏源) 그리고 변강사지(邊疆史地)를 연구하던 서송(徐松)․장목(張穆)․하추도(何秋濤) 등에 이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작용하였다. 역사연구의 객관성을 높이면서 다른 한 편 전통적인 도덕주의를 숭상하는 전통성을 탈피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청말에 이르면 시대의 변화와 함께 전통사학의 근대적 전환이 가속화된다. 즉 역사연구가 중국 근대사회의 특징을 반영하여 특히 제국주의 침략과 중국의 대내적 모순 즉 봉건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역사적 경향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근대적 과학성을 보였다. 이같은 변화는 연구중심의 변화와 연구범위의 확대 그리고 전문영역 연구의 심화와 계통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1840년 아편전쟁을 전후하여 1910년 신해혁명을 거쳐 5․4운동시기까지 지속되었다.
 
2. 명대 사학의 특징
 
(1) 정치권력의 간섭과 대규모 편찬사업
 
명의 건국은 이민족 몽골의 지배를 극복하고 한족이 다시 통치권을 회복한 것이었다. 때문에 명은 한문화의 부흥이라는 과제를 필수적으로 안고 있었다. 사학도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분위기를 따라 매우 활발한 듯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황제의 전제권력을 강화시켜 조정과 백성에 대한 통치권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폭력적 통치기구와 함께 학교제도와 과거제도 그리고 팔고문(八股文)의 사용은 당시 지식인들의 의식을 완전히 정주학(程朱學)의 범위에 묶어놓았다. 그 위에 󰡔대명률(大明律)󰡕의 제정은 그러한 압력수단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명 태조 주원장을 포함한 명 전기 황제들의 역사에 대한 기본 인식은 역사적 사실을 현실정치에 이용하려는 목적이 강하였다. 명 초기의 정치적 조처들 가운데 승상제도의 폐지와 복고식 예제(禮制)의 제정 등은 바로 역사적 경험을 현실정치에 반영한 조처들이었다. 이 시기 사서의 편찬이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던 것은 물론이다. 때문에 명대 초기 사학의 중심은 관찬사학에 있었다. 명대 황제의 명으로 편찬된 도서 200여종의 대부분이 명초 홍무(洪武)와 영락(永樂) 연간에 완성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자세통훈(資世通訓)󰡕․󰡔신계록(臣誡錄)󰡕․󰡔지계록(志誡錄)󰡕․󰡔영감록(永鑑錄)󰡕 등이 모두 정치적 교훈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초기에 편찬된 󰡔대명일력(大明日曆)󰡕․󰡔대명성정기(大明聖政記)󰡕․󰡔대명률(大明律)󰡕․󰡔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奏議)󰡕․󰡔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제사직장(諸司職掌)󰡕 등의 편찬 역시 정치적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통치자들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혹은 특별한 관심은 결국 황제 자신들의 통치적 성과와 희망을 극대화시키는 대규모 저작을 편찬하는 성과를 낳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바람직한 사학발전을 저해하는 간섭과 통제라는 부작용을 감추고 있었다. 아울러 󰡔사서대전(四書大全)󰡕․󰡔오경대전(五經大全)󰡕․󰡔성리대전(性理大全)󰡕의 편찬은 정주학이 의식의 영역에서 그 통치적 지위를 확립하였음을 말해준다. 󰡔영락대전(永樂大典)󰡕과 󰡔대명회전(大明會典)󰡕 역시 그러한 의도와 관계가 있다.
이 중 특히 영락제의 명에 따라 편찬된 󰡔영락대전󰡕은 백과사전의 성격을 가진 유서(類書)로서 통치의 편의와 함께 학술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은 운(韻)의 항목에 따라 글자를 배열하고, 그 글자 아래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예컨대 각 역사서의 「천문지(天文志)」는 모두 ‘천(天)’자 아래 싣고, 「지리지」는 모두 ‘지(地)’자 아래 실었다. 따라서 운에 따라 글자를 찾고 글자에 따라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던 것이다. 편찬에 이용된 자료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은 물론 불경(佛經)․도장(道藏)․의약․수공업․농업 관련 자료들이 총망라되었다. 수록된 도서가 7,000종이 넘었다. 따라서 이 책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가장 규모가 큰 백과전서였다. 모두 22,211권으로 3억7천여 만 자에 이르는 분량이었다. 특히 수록된 내용은 원문을 한 자도 고치지 않고 필요한 부분 전체를 인용함으로서 송․원 이전의 전적(典籍)가운데 후일 전해지지 않은 자료들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데 매우 유용하였다.
 
(2) 정통론(正統論)과 역사편찬
 
정통론은 양계초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통사학 속에 잠복해 있으면서 특정한 시기의 역사편찬의 방향과 구조에 영향을 주었다. 명은 이민족인 몽골의 원을 극복하고 등장한 한족 왕조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원을 긍정하는 모양새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철저한 배외적 성격을 갖는 정통론이 유행하였다. 명대의 정통론은 송렴(宋濂)과 함께 대표적인 유학자로 평가받던 왕위(王褘)와 호한(胡翰)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왕위의 경우 송대 구양수(歐陽修)의 정통론을 계승한 성격이 강하였다. 호한(胡翰)의 정통론은 이후 방효유(方孝孺)와 구준(丘濬)에게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호한은 명초 󰡔원사(元史)󰡕의 편찬에 참가한 적이 있지만, 󰡔정기(正紀)󰡕라는 글에서 남긴 소위 삼기(三紀: 天紀․地紀․人紀)설로 주목을 받았다. 이 중 “천기”와 “인기”의 경우, 천명론과 삼강오륜에 근거한 정통론의 성격이 강하지만, 화이론적 구분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지기”의 경우는 중국과 이적(夷狄)의 구분을 철저히 하는 것으로, 중국은 중국이 다스리고 이적은 이적이 다스려야 하고, 그 원칙이 깨어지면 천하에 혼란이 온다고 하였다. 이같은 정통론은 이후 방효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방효유는 호한의 제자로서 남송 절동지역의 이학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건문제(建文帝)를 위해 지조를 지키다가 영락제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했던 절개가 강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방효유는 정통이론을 담은 󰡔석통(釋統)󰡕에서 각 왕조를 정통(正統)과 변통(變統)으로 구분하고, 다시 천하에는 정통이 하나이고, 변통이 셋이라고 하였다. 즉 인의(仁義)로써 군주의 지위에 오르고 도덕으로 다스릴 경우에 비로소 정통의 지위를 갖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 조건은 천하를 취함이 바르지 않은 변통에 해당되는 경우 그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찬신(簒臣)․이적(夷狄)․적후(賊后)는 아무리 천하를 취한다고 하여도 그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특히 이적을 금수와 같은 무리로 보는 매우 엄격한 화이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방효유의 정통론은 성리학적 강상(綱常)과 화이론적 성격을 아울러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화이론적 성격이 가장 강한 정통론은 역시 구준(丘濬)의 󰡔세사정강(世史正綱)󰡕을 통해 나타났다. 그의 정통론은 원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려는 당시 정치적 수요와도 관련이 있었다. 구준은 철저하게 명 이전의 치세를 화이의 대립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화이론적 기준으로 한과 당은 화하(華夏) 순전(純全)의 시기, 삼국은 할거, 남북조와 남송은 분열, 동진과 오대는 화이 혼란의 시기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몽골의 원이야말로 이적(夷狄) 순전(純全)의 시기로서 세상의 도리가 극도로 혼란하였던 시기라고 하였다. 한족 중심의 강렬한 민족주의 경향을 보였다. 이같은 정통의식에도 물론 철저한 정주학적 가치관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엄격한 화이의 구분 이외에도 윤리강상을 중심으로 한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특히 군신지의(君臣之義)를 강조하고, 남녀구별을 철저히 하였다. 엄격한 화이의 구분 외에도 윤리강상을 위배한 신하나 여자 등은 정통의 황제가 될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가차없이 변통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각종 사서의 편찬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다.
 
(3) 󰡔원사(元史)󰡕와 실록(實錄)의 편찬
 
명대에도 직전 왕조의 정사 편찬은 계속되었다. 주원장은 홍무(洪武) 원년(1368) 8월에 대도(大都)를 함락하고 국사원(國史院)에 보관된 13조(朝) 실록을 비롯한 많은 당안(檔案)자료들을 얻게 되자, 같은 해 12월에 송렴(宋濂)과 왕위(王褘)를 총재로 하고 그 외 남방 출신 재야 학자 왕극관(汪克寬), 호한(胡翰) 등을 참여시켜 󰡔원사󰡕의 편찬을 명하였다. 홍무 2년 8월에 1차로 󰡔원사󰡕 159권이 완성되었다. 미진했던 원 순제(順帝)시기의 기록은 이후 보완되어 이듬해 7월에야 완성되었다. 모두 210권이었다. 2차에 걸친 󰡔원사󰡕의 편찬기간은 이렇게 모두 합쳐 1년이 조금 넘는 짧은 기간이었다. 역대 중국의 정사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에 완성된 것이었다.
이처럼 󰡔원사󰡕의 편찬이 빠르게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실록󰡕과 󰡔후비공신열전(后妃功臣列傳)󰡕․󰡔경세대전(經世大典)󰡕 등의 정리된 자료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새로 등장한 명의 정치적 필요 때문이었다. 당시 주원장은 북원(北元)과 정통을 다투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원사󰡕를 편찬함으로서 명의 정통성을 내외에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른 한 편 자신의 초기 기반이었던 홍건세력에 대하여도 이념적 결별을 알림으로서 자신이 직접 원을 극복하고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통치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한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원사󰡕는 당시 실록에 전하지 않는 기본자료를 적지 않게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지만, 주원장의 정치적 간섭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점, 편찬작업에 참여한 인물들의 사료처리 미숙과 몽골어에 대한 이해부족 등은 큰 약점으로 남는다.
중국에 있어서의 “실록” 편찬은 국가의 중대사를 기록하고 제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편찬되었는데, 당대(唐代)에 비롯되어 이후 송대에 와서 가장 완비된 모습을 보였다. 명대의 실록은 명대 전체 13조 실록이 전하고, 명대 전기 가정(嘉靖) 초까지는 󰡔태조실록(太祖實錄)󰡕․󰡔성조실록(成祖實錄)󰡕 등 아홉 황제의 실록이 편찬되었다. 실록이 편찬될 때마다 감수(監修)․총재(總裁)․부총재(副總裁) 등 훈신과 내각대신들이 그 일의 진행을 맡았다. 당송대에는 실록이 사관(史館)에 의해 편찬되었지만, 명대의 경우는 한림원(翰林院)에 부속된 국사원(國史院)에 의해 편찬되었다. 그리고 과거 실록의 중요사료였던 기거주(起居注)와 일력(日曆)이 정치적 갈등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상황에서 내각의 각 부(府) 공문서 자료와 임시로 수집한 각종 자료들이 실록의 주요사료가 되었다. 명대에 있어서 실록의 편찬은 그 기록을 둘러싸고 정치적 대립이 자주 표면화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영락제가 쿠데타 성공 후 󰡔태조실록󰡕에 대한 두 차례 개수(改修) 시도가 그것을 잘 반영한다. 그 과정에서 오류와 곡필, 피휘(避諱) 등이 심하게 나타난 것은 물론이다. 때문에 명대의 실록이 지닌 사료적 가치성은 방대한 분량과 온전한 보존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약점이 많다고 평가된다.
 
(4) 방지(方志)편찬의 역사성
 
중국의 방지는 위진남북조와 당송시대의 발전을 거쳐 명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는다. 방지의 편찬은 중앙의 경우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위한 것이고, 지방은 지역의 자기 정체성과 단결을 높이기 위한 목적의식이 강하다. 그런 점에서 명대의 방지는 신사(紳士)들의 이익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명대의 방지에도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의 지도가 표시되고 아울러 행정단위로서의 그 지역의 역사와 변화 과정을 정리한다. 그 외 자연지리․도로․교량․공공건축․학당과 서원․사원과 도관(道觀)․관개․군사방어․인구와 부세에 관한 자료 등이 정리되어 있다. 아울러 역대의 관원, 향시와 회시의 합격자, 유명한 학자, 예술가, 장서가 등의 전기는 물론 해당 지역과 관련 있는 문장, 주의(奏議), 비명(碑銘) 자료들이 들어있다. 특히 16세기 이후 그 내용이 더욱 상세해지고 자료 또한 풍부해진다.
명대의 방지 편찬은 홍무 연간에 시작되어 전시기에 걸쳐 중앙과 지방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가정 연간에서 만력에 이르는 시기에 1,000종이 넘는 방지가 편찬되었다. 태조 주원장은 명 건국 직후 각 지역의 민정(民情)을 이해하기 위하여 󰡔대명지서(大明志書)󰡕의 편찬을 명하였고, 이후 계속하여 도지(圖志)의 편찬을 명하였다. 그 결과 각 군현의 건치(建置)연혁과 전국의 교통로를 정리한 󰡔대명청류천문분야서(大明淸類天文分野書)󰡕와 󰡔환우통구서(寰宇通衢書)󰡕 등이 편찬되었다. 이후 계속하여 󰡔환우통지(寰宇通志)󰡕․󰡔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등 소위 총지(總志)들이 편찬되었다.
이같은 중앙의 총지 편찬은 자료의 필요에 따라 각 지역의 방지 편찬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각 지역의 방지는 결국 중앙의 총지 편찬을 위한 자료의 역할을 하게 됨으로서 편찬체례 등에서 일정한 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락 10년(1412)과 18년(1418)에 각각 조정은 󰡔수지범례(修志凡例)󰡕 16조와 󰡔찬수지서범례(纂修志書凡例)󰡕 21조를 반포하여 통일된 격식을 만들었다. 이후 이 체례에 따라 각 지역의 방지는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명대의 방지는 그 편찬에 있어서 과거와 달리 성지(省志)라는 체재가 처음 출현하고 정형화되었다. 성지란 각 포정사사(布政使司)의 통지(通志)로서 총지(總志)라고도 칭한다. 예컨대 󰡔산서통지(山西通志)󰡕․󰡔산동통지(山東通志)󰡕․󰡔하남통지(河南通志)󰡕 등이 그것이다. 이들 통지들은 일정한 기간마다 다시 보완되었다. 󰡔귀주통지(貴州通志)󰡕 같은 것은 10차례에 걸쳐 개수(改修)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통지의 편찬은 지방관의 중요임무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아울러 내용 또한 자연지리를 포함하여 사회역사 분야로 시야가 점차 확대되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들 통지는 전국의 총지(總志)와 부(府)․주(州)․현(縣)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명대의 방지에는 군사상의 수요에 따라 관지(關志)․변진지(邊鎭志)․위지(衛志) 등이 새롭게 출현하였는데, 예컨대 󰡔산해관지(山海關志)󰡕․󰡔사진삼관지(四鎭三關志)󰡕․󰡔양진변관도설(兩鎭邊關圖說)󰡕․󰡔구변도지(九邊圖志)󰡕․󰡔천지삼위지(天津三衛志)󰡕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조운(漕運)과 관련한 󰡔조운통지(漕運通志)󰡕 같은 것도 전한다.
 
(5) 사찬의 당대사(當代史)
 
가정(嘉靖) 연간에 이르러 점차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이 증가하면서, 옛 사실을 널리 알고 현실을 보다 자세히 인식하자는 학풍이 유행하게 되어 일종의 경세사학 사조를 이루었다. 이같은 학풍은 당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어, 기전체 형식으로 명대사를 정리한 󰡔용비기략(龍飛紀略)󰡕․󰡔황명계운록(皇明啓運錄)󰡕․󰡔황명자치통기(皇明資治通紀)󰡕․󰡔오학편(吾學編)󰡕 등이 출현하였다. 그 외 기사본말체로 쓰여진 것으로 󰡔홍유록(鴻猷錄)󰡕, 인물의 행실과 연표로 구성된 󰡔국조열경기(國朝列卿紀)󰡕, 편년사 형식의 󰡔황명대정기(皇明大政記)󰡕․󰡔헌장록(憲章錄)󰡕 등이 있다. 이후 계속하여 다양한 당대사 편찬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만력 이후 숭정 연간에 이르는 명말의 시기에 당대사 편찬이 가장 활발하여, 약 200여종 전후의 사서가 편찬되었다. 사회적 모순에 대한 자각과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중 편년체 사서인 담천(談遷)의 󰡔국각(國榷)󰡕은 실록과 저보(邸報) 그리고 명대의 관련 저술 100여종을 참고로 하여 명대의 제도와 함께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고 있다. 사료에 대한 고증이 엄격하고 역사적 평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명대 후기 당대사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왕세정(王世貞)이라고 할 수 있다. 왕세정은 명대사 편찬에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30여년의 노력을 기울여 명대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그가 남긴 비교적 중요한 저작으로는 󰡔국조기요(國朝紀要)󰡕․󰡔천언회록(天言匯錄)󰡕․󰡔엄산당별집(弇山堂別集)󰡕․󰡔명야사회(明野史匯)󰡕․󰡔엄주사료(弇州史料)󰡕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명사 저작을 위한 자료집과 평론집의 성격이 강하였다. 특히 󰡔엄산당별집󰡕 100권은 명대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 중 󰡔사승고오(史乘考誤)󰡕 20권은 엄격한 사료분석에 대한 치밀한 필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이 직접 명대사를 저술하지는 못했지만, 기왕의 명대사학이 지닌 문제점을 매우 엄격하게 비판하였다. 그 비판은 단순히 사료상의 문제점뿐만이 아니라 현실정치에 대한 우려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판정신은 비슷한 시기 이지(李贄)의 역사관련 비판정신과 함께 명말 사학의 파격성을 대표하기도 한다.
(6) 이지(李贄) 사학의 특징
 
이지(1527-1602)는 탁오(卓吾)라는 호(號)로서 더욱 유명하다. 복건(福建)의 천주(泉州) 사람이다. 명 말기에 공자의 시비를 가지고 온 세상의 시비로 삼는 세태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아울러 당시 정치사회의 윤리와 권력자들의 허위와 위선 그리고 형식을 날카롭게 비판한 진보적 사상가였다. 이지가 살았던 시기는 만력(萬曆) 20년 전후의 민생의 위기를 돌보지 않는 관료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교조주의가 팽배하고 명의 치안상황이 극도로 악화되던 때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이지의 분개와 위기감이 그의 저서 󰡔장서(藏書)󰡕와 󰡔속장서(續藏書)󰡕 그리고 󰡔분서(焚書)󰡕 등에 표현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현실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공허한 논리를 견지하는 당시의 이학(理學)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함께 역사연구와 현실정치를 긴밀히 할 필요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지는 기본적으로 “경(經)과 사(史)는 표리를 이룬다”고 하면서 경(經)은 역사인식의 원칙이고 역사 편찬의 목적이며, 사(史)는 역사 편찬의 방법과 내용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경과 사는 하나”라는 기본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역사의 변화를 치란(治亂)의 순환으로 보고, 그 순환은 어떤 사람도 거역할 수 없는 필연적 세(勢)라고 하였으며, 정치적 변법론자의 관점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경세의 방책은 변화해야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역사적 인물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정치적 평가는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지는 이상의 원칙을 가지고 󰡔장서(藏書)󰡕와 󰡔속장서(續藏書)󰡕 그리고 󰡔분서(焚書)󰡕 등을 지었다. 특히 󰡔장서󰡕 68권은 기전체 역사평론서로서 전국시대부터 원대까지의 역사인물 약 800명을 정사에서 뽑아 서술한 정론(政論)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 책이었다. 각 인물의 평가는 기왕의 사가들과는 달리 앞서 말한 기본 원칙에 입각하여 서술하였다. 따라서 구체적인 경세적(經世的) 정책을 실천한 군주와 그들을 도왔던 신하들을 긍정적으로 서술하였다. 예컨대 그는 전국을 통일하고 군현제를 건립한 진시황의 역사적 공적을 높게 평가하여 천고(千古)에 기릴만한 황제라 칭찬하였고, 무측천에 대하여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가 전통적인 유가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다.
󰡔장서󰡕의 가장 큰 특징은 관료의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능력을 구별하여 정치적 능력을 기준으로 한 인재등용의 필요성을 주장한 점에 있었다. 따라서 군신 개인의 도덕적 올바름을 정치적 능력보다 중시하는 주자학을 비판하였다. 결국 이지는 도덕적 평가보다 정치적 평가를 우선하는 관점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당말오대에 있어서 가장 부정적인 인물의 전형이었던 풍도(馮道)에 대하여도 민생안정이라는 정치목적을 달성한 것과 관련하여 군주에의 불충(不忠)을 용인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지가 󰡔장서󰡕를 저술한 의도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구별하는 정치적 관점으로부터 위정자 개인의 도덕적 수양이 모든 정치문제의 해결에 연관된다고 여기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유능한 인재가 임용될 수 있는 도를 확대하는데 있었다. 즉 명조의 위급한 상황과 민생의 위기라는 명말의 현실을 목격한 이지는 개인적 절의를 정치적 능력보다 중시하는 주자학의 기능에 대하여 오히려 유능한 인재의 등용을 막는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장서󰡕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케 하여 민생을 안정시키자는 정치적 목적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이지의 정신은 당시 사상계의 현실적 한계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록 이지의 주장이 당시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꿈이라 하더라도 명말청초 경세적 역사인식의 빗장을 열어 놓은 셈이었다.
 
 
3. 명말청초의 사학
 
(1) 경세적 역사인식의 확대
 
사학은 현실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명말청초의 시대적 상황은 어떤 형태로든지 사학의 특성으로 재현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학은 명 멸망의 교훈을 통해 정치적으로 무능한 군주와 환관의 횡포를 봉건전제로 보고 그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전제로 전개되었으며, 아울러 명 멸망의 사상적 원인으로 이학의 공리공담으로 인한 현실에 대한 여러 가지 모순을 안이하게 대처한 결과라는 자성과 함께 경세치용적 실학의 특징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왕부지(王夫之) 등으로 대표되는 명말청초 유로(遺老)들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송명이학에 대한 반성을 먼저 경사(經史)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발전시켰다. 황종희는 경학과 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먼저 “독서”를 제창하였다. 그 목적은 단순히 옛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경세치용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6경을 모두 도(道)를 기록한 책이라 인식하고 경전의 연구가 결국은 치세의 도를 밝히기 위함이라 하였으며, 사서를 읽는 것 또한 시무(時務)를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여겼다. 황종희는 21사(史)에는 경세와 관련된 업적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인식하였다.
황종희는 역사서술에 앞서 사료의 수집과 정리에 엄격한 객관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심은 그가 독서를 강조하고 경학과 사학을 아울러 중시하는 태도와 일관된 것이었다. 그의 문헌수집에 대한 열의는 경학과 사학은 물론 문학․천문․지리․병형(兵刑)․의복(醫卜) 등 매우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수집된 자료들을 통하여 저작에 임하는 그의 자세는 단순히 호사가적 흥미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이(理)의 변화를 현실과 관련하여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같은 자세를 견지하면서 그는 한 편으로 명대 사료의 논증과 보존에 힘쓰고, 다른 한 편 구체적 역사사실에 의거하여 현실정치의 이상적 개혁방향을 제시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을 편찬하였으며, 아울러 학술사상사를 정리한 󰡔명유학안(明儒學案)󰡕을 정리하였다.
고염무도 공소(空疏)에 대신한 “박학(博學)”을 강조하면서 역시 경서와 사서의 독서를 강조하였다. 경서를 읽을 때에는 반드시 주소(注疏)를 함께 읽어 독단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서를 읽을 때에는 “통고금(通古今)”의 관점을 가지고 사서가 지닌 경세적 의의를 직접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염무의 경사에 대한 궁극적인 인식은 황종희와는 달랐다. 즉 사학은 단지 경학을 통한 경세의 구현에 있어서 수단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강하였다. 비록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학의 보급과 역사지식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과거 중에 사학 과목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러한 주장은 모두 명말 양명학에 대한 반동이라는 경학적 목적을 갖는 것이었다.
고염무는 특히 사학에 있어서의 고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저작에 있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여 사료로 이용되는 증거는 객관적인 비평 즉 원서의 자료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연후에 비로소 이용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독서를 통한 초서(鈔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초서의 누적은 사료간의 비평을 가능하게 하고 아울러 객관적 서술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이후 청대 건륭․가경 연간의 사학과 근대사학으로의 전환에 중요한 비중을 갖는 차기(箚記)의 유행을 낳게 하였다.
사학이 곧 “경세학”이라는 인식은 특히 왕부지에게서 강하게 나타났다. 즉 기본적으로 사학은 경세학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역사 속의 경험과 교훈을 현실적인 실천으로 응용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직면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과거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독통감론(讀通鑑論)󰡕과 󰡔송론(宋論)󰡕 등 사론(史論)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그의 사론은 경세적 성격이 강한 󰡔자치통감󰡕에 대한 사평(史評)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정치사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현실정치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인성(人性)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성격을 갖는 사론은 결국 정치적 교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마련이다. 때문에 그의 사론의 중심에는 정치․풍속․학술․재부(財賦) 등의 구체적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부지는 역사사실에 대한 주관적 평가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역사적 구체상황에 근거하여 객관적 인식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아울러 그 동기와 효과를 함께 분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 문제들을 파악하면서 왕부지는 특히 역사발전의 인과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각 시대는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대가 변할 때마다 그 특성이 달라지므로 현재의 수요에 맞게 사회, 정치제도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였다. 그런 점에서 왕부지가 역사의 진보를 원리(理)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경향(勢)에 의해 지배된다고 본 것은 당연하였다. 어떤 점에서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하나의 경향 또는 방향을 따라 지속적으로 그리고 질서 있게 나아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2) 민족의식의 확대
 
명말청초에 있어서 민족의식은 왕조교체 즉 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정통론과 화이관이 이민족의 지배라는 역사적 현실을 맞이하여 새롭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중국에 있어서 정통론은 전통사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역사관념의 하나이다. 즉 시대 또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반영되던 시대성, 개별성이 강한 이론 중의 하나였다. 때문에 중국사학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정통론은 한족 유가들에게 있어서는 이민족 배척의 이론으로, 정복왕조에게는 중국지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이용되었다. 화이관은 본래 유가정치론의 소위 “왕도천하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일종의 관용적인 개방적 박애주의에 기초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개방적 박애주의도 한족의 우위성이 부정되는 위기상황이 되면 예외 없이 편협한 보수적 배외주의 경향이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인다.
명말청초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볼 때, 황종희․고염무․왕부지 등의 민족의식은 그들의 실천적 행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지 항청운동에 직접 참가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의식은 구체적인 대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황종희는 직접 항청운동에 참가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을 체계적으로 확인할 만한 글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정치이론을 담은 󰡔명이대방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명이대방록󰡕은 󰡔맹자󰡕의 “천하위공(天下爲公)”을 중심원리로 하여 구성된 것이다. 그는 화이론에 의거한 자기 시대의 구망(救亡)의 논리에 집착하지 않고, 정치적 이상의 실천을 통한 근본적인 개혁의 문제들에 보다 치중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화이론적 시각으로 자기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정치일반에 관련한 문제의 해결을 통해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이상에 도달함으로서, 명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확인하고 아울러 이후 세계에 대한 자기의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황종희가 바라는 대방(待訪)“의 대상이 한족에 의해 부흥된 세계의 왕자(王者)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민족의식도 결국은 종족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염무의 민족의식도 그의 개인적 체험과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일지록(日知錄)󰡕 등에서 종족 중심의 색채가 강한 화이론을 주장하였다. 고염무는 만주족의 중국지배 이후 한족의 중국사회에 대한 이민족의 지배적 역할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중화문화의 보호에 주력하였다. 그는 “군신지분(君臣之分)”과 “화이지방(華夷之防)”에 대한 견해를 말하면서 군신간의 명분보다는 민족문화의 보호를 위하여 과거 역사 속에서 관중(管仲)을 예로하여 화이의 엄격한 구분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고염무는 전통적으로 중시되어 오던 군신지분이 이민족의 지배 하에서는 성립될 수 없고, 다만 양이(攘夷)의 문제만 남는다고 여겼다. 때문에 그는 이적(夷狄)의 지배 하에서는 당연히 중국의 도(道)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고염무는 만주족의 한족지배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가의 도통(道統)을 견지하여 이후 한족이 국토를 회복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아울러 이민족 지배하의 한인에게 중국민족과 문화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하려 하였다. 그는 충효라는 유가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만주족의 통치에 저항할 수 있다고 여겼다. 즉 조상 및 유가의 도통(道統)에 대한 충(忠)을 가지고 만주족 청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을 대신하거나 감소시키려는 의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 외에도 고염무는 이적(夷狄)의 한화(漢化)나 한족의 이화(夷化)를 모두 강하게 부정하였다. 이적들이 일단 중국의 치국의 방도를 배우고 중국의 풍속이나 내정을 숙지한 연후에는 반드시 중국을 침략한 사례를 들어 고대 성인들의 제이(制夷)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적을 금수(禽獸)와 동일시하여 중국문화와 접할 수 없도록 격리해야 한다고 했다.
왕부지(王夫之)는 당시에 있어서 가장 철저한 민족의식의 소유자라고 평가된다. 왕부지는 비록 명이 망하고 청이 건립되었지만, 청이 정통의 지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과거의 왕조교체와 관련한 정통론을 강력하게 부정하였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청이 정통의 지위를 갖게되는 상황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리고 󰡔독통감론󰡕을 비롯한 사론에서 철저하게 종족적 입장에서 화이의 엄격한 구분을 강조하였다. 그는 종족의 생존은 자연계의 보편적인 원리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정치조직의 기본작용은 자기 종족의 보위에 있다고 보았다. 이적의 지배는 이같은 보편원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어떤 경우에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 인식하였다. 아울러 왕부지도 고염무 등과 마찬가지로 이적과 구별되는 한족의 민족적 특징으로서 예의와 교화를 강조하였다. 때문에 그는 한족을 보존하고 이적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예교를 지키고 민족의식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민족의 대의는 고금의 통의(通義)로서 일시적인 군신지의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하여 민족지상주의를 주장하였다. 때문에 이적을 섬기는 자는 한 시대의 죄인이 아니라 만세의 죄인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4. 청대의 사학
 
(1) 문화적 전제(專制)와 역사편찬
 
청은 정권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난 후 한편으로는 문자의 옥 같은 문화전제정책을 실행하고, 다른 한 편 한족 지식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과거를 시행하거나 또는 󰡔명사(明史)󰡕를 편찬하거나 또는 유서(類書)와 총서(叢書)의 발간, 대규모 사전류의 편찬 등 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특히 강희(康熙) 이후 대규모 도서들이 황제의 명으로 편찬되었다. 󰡔연감류함(淵鑒類函)󰡕 450권, 󰡔패문운부(佩文韻府)󰡕 444권, 󰡔강희자전(康熙字典)󰡕 42권, 󰡔운부습유(韻府拾遺)󰡕 112권, 󰡔자사정화(子史精華)󰡕 160권, 󰡔분류자금(分類字錦)󰡕 64권 등이 모두 강희 연간에 발간되었으며 규모가 가장 큰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역시 이 시기에 간행되었다.
󰡔고금도서집성󰡕은 중국 현존 최대의 유서이다. 이 책이 편찬되기 시작한 것은 강희 40년(1701)이었다. 10여 년의 노력 끝에 1차 편찬을 마치고 다시 그 증편(曾編)이 완성된 것은 옹정 3년(1725)이었다. 󰡔고금도서집성󰡕에는 범례 47조(條)가 있어서 편찬의 원칙과 방법을 설명하고 있고, 본문은 6편(編) 32전(典), 6,109부(部) 10,000권의 방대한 분량이다. 이 책은 기왕의 유서가 지닌 장단점을 잘 파악하여 매우 수준 높은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분류의 상세함이나 편집의 체계성은 과거의 유서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6,109부 각 부마다 모두 「회고(匯考)」․「총론(總論)」․「기사(紀事)」․「예문(藝文)」․「잡록(雜錄)」․「선구(選句)」․「외편(外編)」․「열전(列傳)」 등의 편(篇)으로 다시 분류하여 기록하고 있어서 중국 수 천년의 각 종 풍부한 사료와 인물들을 간단한 항목 안에서 조사하여 참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편리하다. 그 중에는 특히 각 인물의 「열전」과 관련하여 일반 사서에 수록되지 않은 인물들까지 자세히 수록하고 있어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청은 건륭 38년(1773)에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을 설치하고 󰡔사고전서󰡕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 책의 편찬은 대진(戴震)이 경서(經書), 소진함(邵晉涵)이 사서(史書), 주영년(周永年)이 자서(子書), 기윤(紀昀)이 문집(文集)을 각각 맡았다. 동시에 왕념손(王念孫)․주균(朱筠)․옹방강(翁方綱) 등 당시의 명유(名儒)들이 구체적인 편찬활동에 참여하여 건륭 48년(1783)에 완성하였다. 󰡔사고전서󰡕는 18세기 후반 이전의 대부분의 도서를 포함하는 대규모 편찬사업으로서, 당시 현존하는 경사자집(經史子集) 3,457종과 제목만 전하는 즉 “존목(存目)”의 책 6,793종 등으로 구성되었다.
청은 󰡔사고전서󰡕의 편찬을 통해 전국의 모든 서적에 대한 대규모 수집과 조사작업은 물론 엄격한 내용 검열을 행하였다. 따라서 명말청초의 역사적 사실을 고의로 왜곡하거나 삭제하는 일이 많았고 또 한족의 반청사상을 철저하게 색출 하여 제거하는 작업을 함께 벌였다. 사고전서관이 개설된 이후 적어도 10만부에 이르는 서적들이 금서가 되거나 훼손되었다는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겉으로 내건 명분은 학술사업이었지만 실제로는 학술과 문화에 대한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윤(紀昀)은 󰡔사고전서󰡕에 수록된 책마다 각각의 제요(提要)를 작성하고 그 내용을 모아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200권을 만들었다. 이 책은 수록된 각종 고서적의 진위와 득실에 대해 자세한 서술을 하고 있으며 아울러 내용상의 특징을 정리한 중요한 목록학 저작이다. 이 책은 또 단순한 목록서의 의미를 넘어서 다양한 사학비평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기도 한다.
이외에도 전제사(典制史)의 편찬이 정치적 수요에 따라 행하여 졌다. 과거 간행된 󰡔통전(通典)󰡕․󰡔통지(通志)󰡕․󰡔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잇는 작업이 행해져 소위 ‘육통(六通)’이 속속 간행되었다. 󰡔속통전󰡕․󰡔청통전󰡕․󰡔속통지󰡕․󰡔청통지󰡕․󰡔속문헌통고󰡕․󰡔청문헌통고󰡕 등이 그것이다. 그 외 행정조직과 정치법규 등과 관련한 중요자료로는 󰡔명회전󰡕을 본뜬 󰡔청회전(淸會典)󰡕이 건륭이래 광서(光緖)연간까지 계속 편찬되어 1200권이 넘는 분량이 되었다. 기구의 편제(編制)․직장(職掌)․인혁(因革)․장고(掌故) 등이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명사󰡕는 순치 연간에 편찬을 시작하여 건륭에 이르는 기간동안 세 차례 편찬을 거쳐 완성된 정사로서 가장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가장 큰 규모로 편찬되었다고 평가된다. 󰡔명사󰡕는 명대 277년의 역사를 「본기」 24권, 「지」 75권, 「표」 13권, 「열전」 220권 등 모두 332권에 담았다. 󰡔명사󰡕는 24사 가운데 체제나 문장 그리고 내용 면에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물론 장기간 자료를 계속 보완한 결과이지만, 특히 편찬 작업에 참여하여 󰡔명사󰡕의 초고에 해당하는 󰡔명사고(明史稿)󰡕를 남긴 황종희의 제가 만사동(萬斯同)의 견실한 기초작업을 주목해야 한다.
 
(2) 건가(乾嘉) 연간의 역사고증과 역사이론
 
1) 건가 연간의 역사고증학
 
청대 초기 황제들이 직면한 문제는 정권의 각종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반청의식을 신속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앞서 언급한대로 한 편으로 학술사상에 대한 통제를 통해 한족 지식인들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청은 투항한 한족 관리들을 중심으로 사관(史館)을 열고 대규모 역사편찬 작업을 벌였다. 다른 한 편 문자의 옥을 일으켜 반청의식을 탄압, 많은 사인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같은 탄압이 계속됨에 따라 현실문제에 대한 언급을 매우 꺼리게 되어 특히 당대사(當代史) 저술은 일종의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고서(古書)의 교감과 정리 등 고거학(考據學)에 종사하였다. 물론 고거학의 발전은 이같은 정치적 배경과 함께 양명학의 문제점에 따른 유학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건가 연간의 사학은 고거학에 기반한 역사고증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시기 사학의 주류와 근본적인 특징을 역사적 사실과 역사기록의 고증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장학성(章學誠) 출현의 단서가 이미 건가 연간의 사학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건가 연간에도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사학의 특징은 역사고증과 역사이론 두 가지 방면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건가 연간의 사가들은 한유(漢儒)의 훈고 방식을 따라 고서와 고대의 명물(名物), 전장(典章)제도를 비롯한 구사(舊史)에 대한 교감(校勘)․변위(辨僞)․고증(考證)․집일(輯佚)․보정(補正) 등의 고증 작업을 통해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작업들은 당시 사가들이 현실정치를 피하여 자신의 필생의 정력을 바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이기도 했다. 이 시기 역사고증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왕명성(王鳴盛)․조익(趙翼)․전대흔(錢大昕)․최술(崔述) 등을 들 수 있다.
왕명성(1722-1797)은 건륭 연간에 관직이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에 이르렀지만, 42세 이후 소주(蘇州)에 거처를 정하고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 󰡔상서후안(尙書後案)󰡕, 󰡔아술편(蛾術編)󰡕 세 책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소학․목록․금석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 중 󰡔십칠사상각󰡕은 정사에 대한 교감, 고증을 진행하면서 여러 사서의 우열 및 그 작자에 대한 평론과 함께 역사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론을 시도하였다.
조익(1727-1814)은 건륭 연간에 관직이 귀주(貴州) 귀서병비도(貴西兵備道)에 이르렀지만, 46세 때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향리 강소 양호(陽湖)에 내려와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저작으로 󰡔이십이사찰기(二十二史札記)󰡕, 󰡔해여총고(陔餘叢考)󰡕가 대표적이다. 특히 󰡔이십이사차기󰡕는 비록 역대 정사에 대해 고감, 차이의 고증과 주석 따위의 작업을 하기는 했으나 개별사건이나 자구에 대한 고증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주제를 선정한 방식은 비교적 넓고 또 큰 주제를 중심으로 상호 관련된 자료를 집중적으로 모아 역사상 주요한 역사사실을 종합적으로 천명함과 아울러 평론을 할 수 있었으며 매우 강력한 종합 능력이 있었다. 주로 제도와 옛날 사실에 대한 평론이 주요 내용이었다. 아울러 역대 정사의 득실을 체계적으로 평론한 것이다.
전대흔(1728-1804)은 건륭 연간 관직이 첨사부 소첨사, 광동 학정(學政)에 이르렀다. 48세 이후 소주에 거처를 정하고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넓고도 깊어 경사(經史)는 물론천문․지리․문자․음운․금석․시문에 모두 능하였다. 그러나 학문의 중점은 사학에 있었다. 당시 일반적인 경학을 중시하고 사학을 경시하는 풍조를 비판하고 경사(經史)를 동등한 지위로 보고 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보원사예문지(補元史藝文志)󰡕, 󰡔원사씨족표(元史氏族表)󰡕 등이 전한다. 그 중 󰡔이십이사고이󰡕는 문자의 교감과 사물과 그 이름의 훈고(訓詁), 전장(典章)제도의 고찰과 해석에 상세하고, 더욱이 지리, 관제, 연대의 고찰 등에 중점을 두었다.
최술(1740-1816)은 젊은 시절 회시(會試)에 거듭 낙방하자 자신의 재능이 과거 준비에 맞지 않음을 알고 고서의 변위(辨僞)와 고증에 노력을 기울였다. 최술은 특히 선진(先秦)시대에 관한 고증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30세에 󰡔고신록(考信錄)󰡕저술의 뜻을 세우고 44세 되던 해 저술을 시작하여 66세인 가경 10년에 완성하였다. 󰡔고신록󰡕은 모두 36권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요순시대와 하․상․주 시대의 사실에 대하여 경전의 정문(正文)을 기준으로 2차적인 전주(傳注)나 제자백가의 의심 가는 부분을 가려내는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위서(僞書)를 가려내는 작업 외에도 잘못된 역사기록에 대한 교정을 시도하였다. 왕명성 등이 구사(舊史)의 시비와 정오(正誤)를 가려내는 고증에 그친데 비해, 최술의 고증은 그 범위가 선진시대 6경이 서술한 역사사실의 진위를 가려내는데 주력하였다. 최술의 󰡔고신록󰡕은 후일 고힐강(顧頡剛)의 의고사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2) 장학성(章學誠)의 역사이론
 
장학성(1738-1801)은 자가 실재(實齋)이며 절강 회계(會稽)사람이다. 장학성은 어려서부터 역사책 읽기를 좋아하였다. 경전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아도 역사책을 읽으면 그 내용의 득실이 곧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사학의 원리와 체례에 대한 연구에 필생의 노력을 다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완성한 저서가 바로 󰡔문사통의(文史通義)󰡕이다. 그 외 목록학 관련 󰡔교수통의(校讎通義)󰡕와 󰡔화주지(和州志)󰡕․󰡔영청현지(永淸縣志)󰡕․󰡔박주지(亳州志)󰡕 등 방지(方志)를 편찬한 적이 있고, 또 호광총독(湖廣總督) 필원(畢沅)을 도와 󰡔호북통지(湖北通志)󰡕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했다.
장학성은 당시 의리를 공담하는 이학이나 고증만을 내세우는 한학 모두를 진정한 학문이라 보지 않았다. 그는 절동사학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경세치용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때문에 장학성의 사학은 청 중기 18세기 후반 시대적 수요에 따른 전통시대 유학사상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장학성의 사학은 유학 자체내의 경세적 요구에 응답하여 일어난 새로운 사상적 경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유교전통의 일부로 출발한 역사에 관한 사상을 점검하고 재평가하려는 역사성이 강하였다.
장학성에 의하면, 유가경전은 바로 역사의 영역에 속하며, 그것을 역사와 별개의 원리적, 도덕적 규범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했다. 그는 “6경이 모두 사(六經皆史)”라고 하여 유교경전을 사(史)라고 보았다. 이 말은 거꾸로 역사는 경전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규범과 준거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이다. 경전과 함께 역사가 현실성을 강하게 갖는 동시에 또 다른 의미에서 신성화의 복선을 내포하고 있었다. 장학성이 말한 “6경이 모두 사(六經皆史)”라는 의미는 다음의 특징을 지닌다.
첫째, 6경 중에 보이는 것은 단지 삼대(三代)에 있어서 아직 관사(官師)가 분화되지 않았던 시절의 도(道)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도는 6경을 통해 확인할 수 없다. 이는 당시 “6경이 (불변의)도를 싣고 있다(六經載道)”는 명제에 대한 강력한 반동이었다.
둘째, 6경이 이미 도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면 경학가들이 고증․훈고를 아무리 해보았자 경전의 진정한 의미에 통하는 것 역시 어렵다. 현재를 버리고 과거를 찾으며, 인간사를 버리고 본성과 천도를 말해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 6경이 도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면, 문사(文史)가 도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6경이 다만 삼대의 도를 말하고 있다면 그 이후의 도는 당연히 삼대 이후의 사(史)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6경이 모두 사(史)”라는 주장은 이 단계에 와서 그 현실적 의미가 극대화된다. 6경은 본래 선왕(先王)의 정전(政典)이요, 관청의 공문서였음으로 당대의 군주인 시왕((時王)이 행하는 제도와 정전이 바로 6경과 같은 것이라 여겼다. 바로 이 점에서 청조 황제권력에 봉사하는 장학성의 보수성과 법가적 색채가 엿보인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장학성이 도덕보다는 강력한 정치주의 경향을 띠는 이러한 특징을 19세기 경세론과 관련하여 주목하기도 한다. 장학성이 각종 방지의 편찬에 참여했던 궁극적인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외에도 장학성은 “사의(史意)”를 제창하여 사서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역사적 의미(義)이고, 사서가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事)이며, 그것이 세상에 전해질 때 의지하는 것은 문장(文)이라 하여 사학의 세 요소로서 중시하였지만, 그 중 으뜸은 역시 의(義)라고 하였다. 따라서 단순한 역사편찬(史纂)과 역사고증(史考)은 진정한 의미의 사학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의(義)를 확인하는데는 단대사 보다는 통사가 맞는다고 하였다. 아울러 사가에게 “사덕(史德)”을 강조하였다. 유지기의 사가가 지녀야 할 삼장(三長) 즉 재(才)․학(學)․식(識) 외에 사가의 심술(心術)을 가리키는 “사덕”을 강조하였다. 이는 사가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수양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역사사실을 객관적으로 보거나 포폄과 선악을 공정하게 보는데 필수적이라 하였다.
장학성은 특히 방지(方志)의 편찬과 관련한 이론과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진정한 방지학의 성립은 장학성에게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방지학과 관련한 이론은 실제 각종 방지의 편찬작업에 참여한 경험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장학성은 방지의 성격을 천하의 역사를 구성하는 “일국지사(一國之史)”로 규정함으로서 방지의 역사성을 강화시켰다. 아울러 방지의 내용과 체례를 체계화시키기 위하여 각 지역의 지리연혁은 물론 정사의 열전에 해당하는 “지(志)”, 율령과 전례에 해당하는 “장고(掌故)”, 문선(文選)․문원(文苑)에 해당하는 “문징(文徵)” 등 삼서(三書)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국사의 기(紀)․표(表)․지(志)․전(傳)과는 달리 외기(外紀)․연보(年譜)․고(考)․전(傳)의 체제를 갖출 것을 강조하였다. 장학성은 사가에게 삼장(三長)과 함께 사덕(史德)을 강조하였듯이 방지의 편찬에도 식족(識足)․명족(明足)․공족(公足)을 주장하여 범례를 정하고, 방지의 역사성과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3) 청말 위기의식과 경세사학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사학은 두 가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는 대내적으로 한계에 이른 봉건체제의 모순에 따른 위기감이고 다른 하나는 대외적인 제국주의 침략에 따른 위기감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이미 18세기 말부터 관리들의 부패, 군비의 부실, 재정상태의 악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위기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외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더욱 가중되었다. 위기의식은 이후 경세, 자강, 변법, 입헌 등의 근대 정치사상과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진행되었고 사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건가 연간에도 대진․장학성 등이 일정한 경세의식을 지니고 역사를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학문상의 경세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었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회현실문제의 개혁에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도함(道咸) 연간에 이르면 건가 연간의 고증학적 객관주의나 고전주의가 공리적이고 현실적인 경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사람이 바로 공자진(龔自珍)과 위원(魏源)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당시의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공자진은 특히 국내 봉건통치의 부패에 착안한 주장을 펼쳤고, 위원은 대체로 외세의 침략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공자진은 󰡔존사(尊史)󰡕와 󰡔고사구침론(古史鉤沉論)󰡕에서 시대위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변법과 개혁 즉 변혁이야말로 역사의 필연임을 주장하였다. 번잡한 고거의 학풍을 비판하고 역사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현실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리하여 사학에 있어서 진보적 변역(變易)관이 날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역사 변역관에 근거하여 역사적 진화를 주장하였고, 아울러 금문경학의 공양삼세설을 중심으로 사회의 변화를 주시하였다. 그 외에도 사론을 중시하고 현실정치와 경제, 군사 등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려는 민족의 자각으로 이어졌고 사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위원도 공자진과 마찬가지로 공양삼세설을 중심으로 한 역사변역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성무기(聖武記)󰡕를 통해 청대의 군사와 정치를 다루었는데, 이는 아편전쟁의 패배에 따른 반성으로 편찬한 것이다. 연구를 통해 군정(軍政)의 폐단을 지적하고 복잡한 변강(邊疆)의 민족문제를 분석하였다. 아울러 영국의 침략위협과 그들의 침략활동의 형식과 특징 등에 대하여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의 편찬은 청말 당대 연구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위원은 또 󰡔해국도지(海國圖志)󰡕를 통하여 서양의 장기(長技)를 배워 그들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서양에 관한 종합적 관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원사신편(元史新編)󰡕을 통해 외세의 침략에 대한 경각심을 상기시키려 하였고 아울러 원의 역사적 경험을 청과 대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서계여(徐繼畬)의 󰡔영환지략(瀛環志略)󰡕 역시 지도를 중심으로 세계 각지의 지리와 역사변천, 경제와 문화 그리고 풍토 등에 대하여 비교적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소개를 하였다. 요형(姚瑩)의 󰡔강유기행(康輶紀行)󰡕은 아편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아시아 진출과 그에 대응하는 티벳․네팔․인도의 대응을 살폈다. 중국의 서남(西南)변방지방에 대한 실지조사와 연구로서 가장 뛰어난 저작이다. 이들은 모두 경세치용적 성과들로서 이후 사학에 매우 적극적인 영향을 주었다. 즉 변강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외국사의 소개와 연구, 청말 당대사 저술과 명사연구 등을 예고하였다.
변강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관심은 위원과 요형의 뒤를 이어 먼저 서북지방의 사지(史地)에 대한 연구를 자극하였다. 이같은 경향은 새로운 사학영역을 개척한 외에도 시사(時事)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실제적인 학풍을 중시하게 했다는 점에서 청말 역사와 지리학의 발전을 크게 촉진하기도 했다. 이들 문제에 대한 비교적 전문적인 연구는 기운사(祁韻士)․서송(徐松)․심요(沈垚) 등이 이 작업에 동참하여 일정한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이 작업에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장목(張穆)의 󰡔몽고유목기(蒙古遊牧記)󰡕와 하추도(何秋濤)의 󰡔삭방비승(朔方備乘)󰡕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외국사의 소개와 연구에서도 활발한 작업이 시도되었다. 특히 아편전쟁 시기에 외국사에 대한 소개와 연구가 성행하였다. 침략의 주체를 제대로 이해함으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 부국강병으로 나아가려는 희망과 서방의 근대문화와 세계인식의 단서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외국사 연구 초기에는 제정 러시아를 주요 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17세기 전후 러시아의 영토확장의 기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의 정황을 파악하려는 근대적 시도는 유정섭(兪正燮)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러시아에 관한 초보적인 역사서로 󰡔아라사사집(俄羅斯事輯)󰡕․󰡔아라사사보집(俄羅斯事補輯)󰡕 등이 있다. 그 외 장목(張穆)․요형(姚瑩) 등이 러시아에 관한 비슷한 내용을 편찬하였다.
영국에 대하여는 그들의 침략야욕을 주의한 하대경(何大庚)의 󰡔영이설(英夷說)󰡕이 있고, 이후 소영유(蕭令裕)의 󰡔기영길리(記英吉利)󰡕, 섭종진(葉鍾進)의 󰡔영길리국이정기략(英吉利國夷情記略)󰡕 등이 있어서 아편전쟁 직전 중국인의 영국에 대한 인식 수준을 알 수 있었다. 아편전쟁이 발발한 후 임칙서와 요형(姚瑩) 등은 더욱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직시하고 그같은 의식으로 “눈을 뜨고 세계를 바라보라(開眼看世界)”고 주장하였다. 외세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한 준비로서 그들을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임칙서가 보관한 자료를 정리한 󰡔양사잡록(洋事雜錄)󰡕․󰡔사주지(四洲志)󰡕․󰡔화사이언(華事夷言)󰡕 등이 간행되었다.
당대사에 대한 저술 역시 성행하였다. 청 중엽까지만 해도 당대사 연구는 일종의 금구(禁區)가 되어 관찬을 제외한 사찬의 사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편전쟁 전후 청의 사상통제력이 약화되고 사회 위기의식이 군사와 재정부분에서 두드러지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해당 문제의 기원과 그와 관련한 국가의 약화의 원인을 탐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같은 경향을 담은 책으로는 전의길(錢儀吉)의 󰡔비전집(碑傳集)󰡕이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학술이나 사상 관련 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 그치지 않고 정치와 사회 등 각종 활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에 관한 자세한 활동을 기록하였다. 이후 이원도(李元度)의 󰡔국조선정사략(國朝先正事略)󰡕․이환(李桓)의 󰡔국조기헌유징초편(國朝耆獻類徵初編)󰡕 등이 역시 청인 전기(傳記)자료를 대규모로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이 시기 사가들은 특히 아편전쟁사 연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편전쟁사 연구를 통해 구국(救國)의 방략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위원의 󰡔도광양소정무기(道光洋艘征撫記)󰡕, 양정남(梁廷柟)의 󰡔이분문기(夷氛聞記)󰡕, 하섭(夏燮)의 󰡔중서기사(中西紀事)󰡕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책은 대부분 강렬한 애국주의 민족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때로는 직접 경험한 사실을 가지고 영국의 침략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또 구체적인 역사 사실을 가지고 임칙서․등정정(鄧廷楨)․관천배(關天培)․진화성(陳化成) 등의 아편 반대와 항영전쟁 과정에서의 역사적 공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족의 이익을 팔아 넘긴 부패한 청의 관리에 대한 강한 비판을 싣고 있었다. 이들 책들은 당시 외세의 침략이 날로 더해 가는 상황에서 반침략 투쟁을 촉진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밖에도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공을 중흥의 위업으로 찬양한 설복성(薛福成)의 󰡔중흥서략(中興敍略)󰡕, 주공창(朱孔彰)의 󰡔중흥장수별전(中興將帥別傳)󰡕, 왕개운(王闓運)의 󰡔상군지(湘軍志)󰡕 등이 있고, 아편전쟁 후 외국인과의 교섭 즉 이무(夷務)와 그를 연구하는 외교사에 대한 관심 그리고 부국강병과 관련한 과학기술 등에 대한 번역서 등이 간행되었다.
 
(4) 근대사학으로의 전환
 
일반적으로 근대로의 전환을 이루는 시점이라 인식되는 1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사학은 모순이 극대화된 봉건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자기반성 혹은 자기혁신과 함께, 밀려오는 외세에 대한 자기방어와 위기극복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응으로 먼저 명말청초에 적극성을 보였던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경세치용적 가치관에 주목하고, 다른 한 편 청대 중엽이후 공양학적 변역(變易)관에 기초한 전통사학 내부의 분화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대내외적 위기상황의 극복과 사회개혁에 대한 현실적 관심을 중심으로 과거 역사를 다시 돌아보고 아울러 자신들의 현재상황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역사서술들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문화적 위기와 일체화시켜 그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한 흔적들은 근대사학으로의 전환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기도 했다.
이후 중국의 역사서술은 19세기 후반 현실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개혁, 그리고 그에 이은 혁명에 대한 기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전개된다. 개혁 혹은 혁명은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의 변화와 함께 외세에 대한 자각이 깊어질수록 강도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굴욕들은 특히 중국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민족주의의 시급한 부활을 절감하게 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근대사학은 어떤 점에서는 근대중국의 민족주의 역사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중국사학의 근대화에는 중국사학의 전통 그 자체에 내재한 변화의 기제 이외에도 군사적 침략과 문화사조의 유입이라는 외세에 대한 자각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민족의 위기를 포함한 현실적 위기에 대한 대응을 염두에 둔 경세적 사학경향은 진화론의 수용과 서학의 광범위한 유입 등이 더해지는 양무운동시기를 거쳐 신해혁명시기까지 계속되었고, 점차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같은 사학경향을 당시에 이미 “신사학(新史學)”이라 불렀던 것은 과거의 전통적인 역사인식과 차별화 하려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엄복(嚴復)의 서학(西學)에 대한 번역과 하증우(夏曾佑)․유이징(柳詒徵)․유사배(劉師培) 등의 역사교과서 편찬과 함께 장병린(章炳麟)․양계초(梁啓超) 등의 역사인식이 근대사학으로의 전환기에 있어서 신사학 체계를 정립하고 있었다.
특히 장병린은 그의 정치적․경학적 주장과 관련하여 보통 혁명적 정치가 혹은 경학가로 분류되어 근대사학의 성립과 무관한 것으로 인식되기 쉬우나 실제 그에게 있어서 사학은 사회변혁을 위한 이론적 무기였다. 그의 저서 󰡔구서(訄書)󰡕의 「존사(尊史)」․「애분서(哀焚書)」․「애청사(哀淸史)」 등은 모두 사론으로서 전통사학이 지니고 있는 이론의 결핍, 과학적 분석의 결핍 등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장병린은 특히 사회적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은 모두 쉼 없이 진보하는 것이라 여기면서 옛 사서에는 물질문명사와 관련하여서는 거의 주의하지 않고 왕조의 흥망과 관련한 정치와 인사(人事)로만 채워져 있을 뿐이라 하였다.
양계초는 신사학의 이론적 체계를 구체적으로 정립하였다. 그의 사학이론에는 신(新)․구(舊)와 중(中)․서(西)의 절충적 특징이 잘 나타난다. 즉 그는 청말 공양학설과 서양진화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그의 사학사상은 무술변법 실패 이후 일본에 망명한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그는 일본서적을 통해 많은 서양사학 관계 서적을 접하게 되었고, 또 당시의 현실적 수요를 깊이 자각하고 「신사학(新史學)」․「중국사서론(中國史叙論)」 등 문장을 통해 구사학(舊史學)을 비판하고 역사진화론을 주장하면서, 역사는 당연히 인간의 집단활동을 탐구하여야 하고, 역사 발전은 “공리공칙(公理公則)”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서양의 진화이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후일 과학문명의 발달로 모든 것이 앞서가고 완전한 사회적 진보를 계속하고 있다고 믿었던 유럽이 1차세계대전의 전화에 휩쓸려 오히려 황폐해 버린 현장을 직접 다녀오고 난 뒤에는 초기의 입장을 바꾸어 중국적 가치로의 회귀를 시도한다.
신사학은 결국 당시 중국이 직면한 위기를 해결하고 자강을 실천하기 위한 민족주의․애국주의 경향을 강하게 띰은 물론, 다른 한 편 “과학”으로 포장된 서학의 치사(治史)방법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학체계였다. 이 같은 중국 근대사학의 성립과정 속에서 전체적 경향을 이끌어 가던 관념은 “변역(變易)”․“민족”․“과학”이었다.
청이 붕괴된 후 특히 5․4운동시기를 전후하여서는 신문화운동의 구호 아래 서양의 다양한 학설들이 대규모로 유입됨에 따라 역사방법론 또한 더욱 폭넓게 수용되었고, 이에 따라 양계초․하병송(何炳松)․왕국유(王國維)․호적(胡適) 등의 다양한 대응과 함께 고힐강(顧頡剛)․진인각(陳寅恪)․진원(陳垣)․부사년(傅斯年) 등에 의한 관련 연구가 큰 성과를 보였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마르크스 유물주의에 입각한 사관이 전파되어 신속하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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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화 교수 l E-mail : yhlee@and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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